1. 런던, 좌파, 그리고 혼동
런던 중심부의 약간 북쪽에 유스턴(Euston)이라는 곳이 있다. 유명한 영국도서관에 가깝다. 이곳 유스턴에 위치한 한 펍(영국식 선술집-편집자)에 일단의 좌파 성향의 언론인과 지식인들이 모여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었다. 2006년 4월 모임의 결과가 ‘유스턴 선언’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후 사람들은 이들을 유스턴 선언 그룹이라고 불렀다. 포스트 맑스주의 논쟁에서 라클라우, 무페와 논쟁한 것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좌파 이론가인 노만 제라스가 ‘선언’의 서명자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의 핵심 주장은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면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연대하는 좌파는 좌파 고유의 가치, 즉 민주주의, 자유, 평등을 배신했다는 것이었다. 서구적 전통에서 나온 보편적 가치의 지위를 가지는 이러한 규범적 기준들은 이슬람적 전제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같은 맥락에서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것은 보편적 가치를 위배하는 것이고 반민주적, 반인권적 이슬람 근본주의와 손을 잡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주장은 많은 문제점들을 내포하지만 세 가지만 지적하려 한다.
보편적 가치와 현실의 복잡성
첫째, 그들은 좌파임을 자임하고 자유를 증진하는 경제적 발전을 옹호하는 동시에 구조적인 경제적 억압과 환경 파괴에 반대한다고 천명한다. 그런데 두 가지의 목표가 공존할 수 있는가가 문제다. 최근 몇 년간 영국의 좌파 저널인 ‘사회주의 연감’의 주제는 새로운 제국주의적 지배에 관한 것이었다. 금융팽창과 초국적 기업의 지배에 의한 세계경제의 재편이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를 의미하는가 아니면 지배구조의 고도화와 세련화인가에 대한 논쟁은 있었지만 단기적으로 제국주의적 착취가 강화되고 있다는 것에는 일정한 공감대가 있었다.
맑스주의 지리학자인 데이빗 하비는 이러한 새로운 국면의 제국주의를 ‘수탈에 의한 축적’이라고 특징지었다. ‘선언’의 입장은 이러한 현실을 제대로 분석할 수 없다. 초월적이고 보편적 가치를 내세우면서 경제발전이 경제적 억압, 환경파괴, 군사적 개입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해 눈감아 버렸다. 앙상한 보편적 가치의 잣대로 옳고 그름을 가르기에는 현실의 착취와 억압은 너무 복잡하다.
다음으로 ‘선언’은 미국(특히 네오콘)이 주도하는 군사력을 통한 패권적 개입전략에 반대하는 것을 반동적인 이슬람 근본주의에 동의하는 것으로 오해 또는 왜곡하고 있다. 민주적 좌파는 ‘평화’라는 대의 하에, 비록 사담 후세인이 악명 높은 독재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전쟁에 반대했다. 이것이 곧 사담 후세인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탈레반 체제 하에서 기본적 인권조차 보장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부시와 블레어가 주도하는 아프가니스탄 침략전에 찬성할 수 없었다. 10년 전 클린턴이 밀로세비치의 세르비아를 공습했을 때 우리가 그것에 반대했던 이유 또한 밀로세비치의 대세르비아주의와 인종주의를 옹호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초월적 이념으로 편 가르기
마지막으로 위에서 지적한 복합적 현실을 몇 가지 초월적 가치로 분석하려 하는 것 자체의 위험성을 지적해야 한다. 민주주의, 자유, 평등, 인권 등 ‘선언 그룹’이 보편적 지위를 부여하고 있는 가치들은 결코 초역사적인 보편성을 획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가치들은 이데올로기 투쟁에 개방되어 있으며 어떤 계급 또는 사회계급이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노먼 제라스가 라클라우와 무페의 상대주의적 편향을 비판하면서도 현실의 삶으로부터 새로운 설명적 근거를 찾으려는 시도, 즉 유물론적 분석에 근거한 비판적 분석의 준거점을 찾으려는 방향으로 나가지 못하고, 보편적 원리로서의 정의를 맑스주의 재구성의 근거로 삼으려 했을 때 이미 감지되었던 좌파 일부의 자유주의와의 공모가 공개화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즉 상대적으로 독립된 이데올로기 투쟁의 복잡성을 단순화시키고 그 이데올로기 투쟁의 준거점이 될 수 있는 유물론적 근거를 찾으려하기보다는 초월적 이념에 기대려함으로써 너무 간단하게 ‘이편’과 ‘저편’을 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선언’을 비판적으로 논평한 드바인과 비담이 권력구조에 대한 분석을 제안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좌파 성향의 월간지 Red Pepper 2006년 6월호에 실린 ‘Left on the Euston Platform’)
2. 서울, 좌파, 그리고 혼동
최근 민주노동당의 분당과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을 접하면서 불현듯 한동안 잊고 있었던 ‘유스턴 선언’이 떠올랐다. 일단 두 사건의 맥락은 크게 다르다. 언론의 주목을 받기는 했지만 유스턴 그룹은 소수의 중도좌파적 지식인과 언론인에 국한된 사건이었음에 비해, 민주노동당의 분당 사태는 원내 의석을 가진 제 3당이 쪼개지는 정치적 사건이었기 때문에 둘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당 사태가 유스턴 선언을 연상시킨 것은 분당파의 소위 ‘종북주의’ 비판과 유스턴 그룹의 이슬람근본주의에 대한 태도가 유사한 논리전개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층적인 관계를 단순화시키고, 보편적 이념을 제시한 후 그것을 기준으로 이편과 저편을 가르는 오류. 이러한 유사점에 근거해 평등파의 분당 사태가 가지는 문제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분석상 한계 보여준 자주파 비판
첫째, 평등파는 자주파를 북한추종주의로 규정한 후 이들을 ‘민족주의’와 등치시킨다. 그리고 ‘민족주의’를 시효 만료된 낡은 이념으로 선언한다.
이런 인식은 현재 민주적 좌파가 분석해야 할 대상을 정확히 인식하는데 필요한 이론적 자원을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자주파=북한 추종주의=민족주의라는 도식을 근거로 북한의 민족주의화된 스탈린주의는 오류이기 때문에 자주파도 오류이며 그래서 민족주의도 틀렸다는 논리를 전개하는데, 이는 각각의 항이 가지는 복합적인 의미를 논외로 하더라도 등식이 성립하기 위해 버려진 수많은 전제들을 고려하지 못하게 한다. 심각한 분석상의 한계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즉 역사적 맥락과 공시적 국제적 권력관계를 분석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현 북한 체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동북아의 냉전질서의 성립과 변천을 고려해야 하며 계속되는 미국의 핵위협이 고려되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주파를 ‘역사적 실체’로서의 북한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자로 간주하는 것도 과도한 단순화이다. 북한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원초적인 민족주의적 정서, 미국에 대한 적대감 등이 자주파를 구성하는 또 다른 요소이기 때문이다.
또한 잘못된 전제와 방향에도 불구하고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민주적 개조에 대한 열망도 근저에 깔려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여기서 지적해야할 것은 자주파의 민족주의적 정서는 보다 큰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보적 의미의 상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민족주의‘가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가진 담론임을 가리킨다. 독도 영유권 분쟁과 관련된 자주파의 행동은 극우파의 그것을 뺨치는 것이었다. 많은 당원들이 얼굴을 들 수 없게 했던 사건이다. 그러나 그것이 국민들의 정서였다. 축구, 야구 가릴 것 없이 일본과 대결할 때마다 드러나는 ’반일 감정’을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수만 명 당원이 북한 추종주의인가?
자주파의 ’진보‘는 맹목적 민족주의와 북한추종주의에 묶여 있다. 그러나 정확히 해야 할 것은 자주파로 분류되는 정치집단을 민족주의 또는 북한 추종주의로 환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수만 명의 당원을 시대착오적인 북한추종주의자로 낙인찍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진보정당이 얻는 것이 무엇인가? 평등파의 과제는 민주주의와 진보에 대한 열망이 어떻게 낡은 민족주의적 담론과 북한 추종주의와 공존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공존을 어떻게 자주파 지도부가 북한추종주의로 현실화시킬 수 있었는지를 분석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들을 향해 ‘종북주의ㆍ패권주의’라고 낙인찍기 보다는 이런 분석에 근거해 스스로의 헤게모니 전략을 제시해야 했다. 즉 자주파 성향의 대다수 당원들의 ‘진보’를 맹목적 민족주의와 북한 추종주의로부터 자유롭게 할 계획이 필요했던 것이다. 위에서 지적한 단순화는 평등파로 하여금 유스턴선언과 유사한 오류를 범하게 한다.
한편으로 신자유주의적 세계경제의 재편과 그것이 가져온 파국적 결과를 말하지만 이러한 경향의 주된 요인 중의 하나인 미국의 소위 ‘신제국주의적’ 지배전략이라는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는 것을 어렵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뿐 아니다. 자본과 노동의 초국적 이동에 따른 새로운 갈등은 기존의 민족주의적 갈등에 인종주의적 갈등을 더하고 있는 현실도 제대로 인식하기 어렵다.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인종주의적 편견과 왜곡된 민족주의의 영향 말고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미국의 대중동전략에 반대하는 아랍민족주의는 또 어떤가? 코소보의 독립을 저지하려는 세르비아인들의 극렬한 반대는?
평등파 지도력 부재의 자기 고백
민족주의가 진보적 의미를 상실했다는 것이 곧 민족주의의 영향력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좌파가 전유하지 못했다고 해서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어쩌면 민족주의가 이미 역사적으로 끝났다고 선언하는 것은 지적, 도덕적, 정치적 지도력이 부족함을 자기 고백하는 것에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코소보의 알바니아인들과 세르비아인들에게 ‘민족주의는 진보적 의미를 상실했다’고 선언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진보적 시각에서 민족주의는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지만 부정되어야할 대상은 아닌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주파의 민족주의적 경향은 평등파가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다원주의적 진보 가치의 재구성 내에 포용되어야 할 것이지 배타적으로 제외되어야 할 이념은 아니다. 문제는 평등파가 그걸 포용할 만한 가치의 재구성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자주파의 오류 때문에 ‘민족주의’를 용도 폐기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결론일 수 있다.
둘째, 평등파의 담론은 ‘북한’과 남한 내 북한 ‘추종세력’을 구분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또한 북한의 ‘입장과 현실’을 대외적으로 표현된 ‘외교적 발언’과 동일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민주적 사회주의 입장에서 북한의 현실을 비판하는 것과 국제적인 고립상태에서 생존하기 위한 북한의 대외적 입장을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며, 북한의 외교적 입장을 그대로 지지하는 자주파의 오류를 비판하는 것이 곧 북한의 외교전술을 비판하는 것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핵을 가지고 있다는 ‘선언’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또한 반핵의 입장에서 북한의 핵실험과 핵무기 보유 시도를 비판하는 것에 선행해야 할 것은 미국의 북한에 대한 지속적인 핵 위협에 대한 비판이다.(자주파가 이런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그것을 비판하는 평등파가 같은 문제를 재생산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한반도 평화의 가장 큰 위협은 미국
분명히 북한의 핵자위권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남한 진보정당의 정치인이 북한의 핵자위권 운운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그러나 북한이 핵자위권을 주장하는 것과 자주파가 이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분리시켜 생각해야 한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시도는 사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기 때문이다. 민주적 사회주의는 ‘평화’의 원칙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러나 힘과 힘이 부딪히는 현실에서 중요한 것은 평화라는 원칙을 되새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평화체제를 구축할 것인가에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한반도 평화정착의 가장 큰 위협요소는 북한의 핵보유 시도가 아니라 미국의 북한에 대한 핵위협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브루스 커밍스는 북한이 처한 위협적인 상황을 잘 지적하고 있다. 몇 가지 예들을 인용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레디앙/서영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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