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남성, 무거움과 엄숙함에서 벗어나자
80년대 학생운동을 생각해보라고 하면 항상 나오는 이미지가 있다. 화염병, 시위용 짱돌, 가두시위, 전경, 유인물, 골방… . 90년대라고 해서 이런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것들은 80년대를 상징하는 주요한 물건들이다. 그럼 90년대 학생운동을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90년대는 80년대만큼 사람들의 기억 속에 명확한 상징을 남기지 못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90년대 학생운동에 대해 기억하는 이미지를 물어보면 대부분 ‘위기’, ‘방황’, ‘좌절’과 같은 부정적이거나 추상적인 단어가 튀어나오는 것이 보통이다. 같은 질문을 나에게 한다면 조금 조심스럽지만 ‘80년대보다 풍부해진 대학 캠퍼스’를 꼽을 것이다. 환경운동, 여성운동, 문화운동, 정보통신운동 등 80년대 화염병과 짱돌은 90년대까지 이어지기는 했으나, 이들 새로운 기운만큼은 분명 90년대 학생운동의 새로운 흐름이고 특징이다.
▲ 인도 노동자들의 메이데이 행사. 시위가 아닌 축제다.
부문계열운동, 부문운동, 영역운동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기존 학생운동의 틀을 넓히고자 했던 시도는 보다 다양해진 사회의 분위기와 맞물려 이전과는 다른 흐름을 만들었다. 이공계 출신자들의 활동에 국한되었던 학생환경운동을 대중운동으로 확산시키고자 했던 환경운동은 농활의 한계를 넘는 환경 현장 활동이란 프로그램과 환경동아리 건설로 이어졌고, 당시 낯설었던 동성애 문제나 대학사회 뿐만 아니라 운동진영 내부의 성폭력 추방을 먼저 제기한 것도 90년대 학생운동이었다. 단순한 문예패 활동을 넘어 소통 통로와 공간에 대한 고민으로 문제의식을 확산했던 문화운동, 생소했던 피시통신과 인터넷을 운동과 접목시키고자 하는 정보통신운동의 노력 등 사회적 파장이나 인상은, 80년대에 미치지 못했을 지라도 80년대 학생운동의 시야를 넓히고 이후 다양한 운동 영역을 만드는 데 큰 기틀이 되었다. 물론 당시에 이러한 흐름에 대해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필자가 참여했던 환경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개량주의’, ‘배부른 이야기’란 꼬리표가 계속 붙어 다녔고, 이러한 꼬리표는 누구나 환경문제를 지적하는 지금도 여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학생정치조직에 의해 대규모적으로 때로는 몇몇 뜻있는 개인들의 헌신에 의해 각 운동영역에 대한 개척은 이어졌다. 그리고 그러한 성과는 2000년대 진보운동의 훌륭한 자산이 되었다. 벌써 10년도 넘은 옛날이야기를 지금 와서 꺼내는 것은 이러한 확장 시도가 운동이 활성화되고 고양기로 접어들었을 때 시작된 것이 아니라, 누구나 ‘위기’를 이야기할 때 시작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영역확장 시도는 '위기'임을 알고 운동을 시작한 사람들에 의해 더욱 확장되고 꽃을 피우게 된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 ‘상황이 어려운데 확장을 어떻게 하나?’는 문제에 직면해서 풀어나가기보다는 문제를 피하고 싶은 사람들의 오류이다. 문제점과 극복지점을 알고 있으되 그것을 선뜻 결행하기 어려울 때 운동은 자기 안으로만 파고들며 종국에는 퇴보하게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90년대 학생운동의 확장시도는 지금의 시점에서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준다.
녹색은 강령이나 정책만이 아니다
지금은 위기인가, 기회인가? 2007년 대선 이후 진보운동이 요동치고 있다. 2월 3일 민주노동당 당대회 이후 민주노동당 당원들의 탈당이 이어지고 있다. 이미 탈당해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을 만들고자 하는 이들 이외에도 심상정ㆍ노회찬 의원이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선언하고 있다. 한국사회당의 경우에도 3월 16일 당대표 선거를 앞두고 당해산과 진보신당 합류 주장이 나오는 등 어느 때보다 진보신당 건설에 대한 역동적인 흐름이 만들어지고 있다. 혹자들은 지금의 상황이 ‘위기’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명박 시대를 맞아 그 대항마가 될 진보정당이 아직도 제대로 된 전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위기’라기보다는 ‘기회’가 될 것이다. 특히 녹색정치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분명 기회이다. 환경사안 대응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진보정당의 모습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진보정치 혁신 논의 과정에서 나왔던 많은 문제점을 둘러보자. 노동조합을 비롯한 대중조직의 배타적 지지, 당원들의 집단 대리가입, 당원들과 소통되지 못한 최고위원회, 자신이 당원인지조차 모르고 있는 페이퍼 당원, 이를 기반으로 한 운동권 정치, 간부들이 중심이 된 간부들만의 당.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아직 우리의 진보신당 논의는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새롭게 만들어질 진보신당이 이념적으로 선명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겠지만, 이것으로만 모든 것을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진보정치가 혁신되었다고 설명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당의 이념과 강령은 너무나 소중한 것이지만, 이는 가장 밑바닥의 기초와 같은 것이라 이것이 진보신당의 외형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초가 약하면 외형도 허약해지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기초만 다지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새로운 진보정당 시대, 녹색의 상상력
당장 진보신당에 필요한 녹색정치의 상상력은 무엇일까? 아직 당이 건설되지 않은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진보신당 건설은 조직 대 조직의 통합이 아니라 진보신당 건설에 의지를 갖고 있는 개인들을 중심으로 재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지역구에서 직접 선출된 조승수 전 의원이나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했던 심상성ㆍ노회찬 두 의원이나 한 달에 1만 원 당비 내는 것이 전부인 일반 당원이나 진보신당 건설에 대한 마음이 같다면 이들은 모두 한 사람의 주체이다. 조직 대 조직의 통합을 통해 ‘1+1=2’라고 생각하는 마음은 매우 편의적인 발상이다. 실제 조직 대 조직의 통합에서 이와 같은 합력은 만들어지기 어려울 뿐더러 오히려 개인의 참여도를 떨어뜨릴 뿐이다.
한 번 상상해보라. 기존 조직과 기득권을 모두 버리고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진보신당. 조직간 상층연대질서를 중심으로 한 진보신당에서 당원 각자가 주체로 설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형태의 시작. 이는 자신이 당원인지도 모르는 페이퍼 당원이나 어느 순간 당적이 옮겨져 당황하는 당원을 막고 개개인의 의지를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이와 함께 상층단위 연대회의 형태나 몇몇 인사들의 발언을 경청하는 자리가 아니라, 개별 당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만민토론회나 지역별 예비당원대회 같은 것이 열려 새로운 진보정당의 이념과 운영에 대한 광범위한 토론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진보신당의 건설 시기, 4월 총선 대응 문제 등 진보신당을 중심으로 한 현안 문제 역시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그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미 민주노동당을 탈당한 이들이 대부분 개인 상태이고, 새로운 진보정당운동 역시 해산을 선언했으므로 개인들의 강력한 결합을 통해 진보신당의 새 기운을 만들기에는 충분한 조건이 갖춰져 있다. 이를 적극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한 혜안이 있었으면 한다. 이와 함께 진보신당에는 녹색정치의 상상력이 적극적으로 도입되었으면 한다. 한국사회당에서 이미 시행하고 있는 중앙위원회 안건 당원 발의제나 초록정치연대에서 시행하고 있는 제비뽑기 방식의 운영위원 선발(운영위원 희망자 중 제비뽑기 방식을 통해 선출)같은 것들은 약간의 보완만 거치면 언제든지 실행 가능한 제도이다.
이외에도 여성정치인 확대를 위한 회의 발언의 남녀순번제, 당비에 대한 예산자치제 시행, 효율적 회의를 위한 규약 제정, 딱딱한 회의방식이 아닌 축제 형식의 당대회, 인물 중심의 선거가 아니라 정책 중심의 선거 전략 등 기존의 유럽 녹색당이 시행하고 있거나 우리 실정에 맞는 새로운 방안을 추가하는 작업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기존의 진보정당이 갖고 있던 남성, 대기업노동자 중심의 이미지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정치가 갖고 있는 중년남성, 무거움, 엄숙함과 같은 이미지를 바꾸고 진보의 새로운 지향을 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진보신당에 거는 기대, 그리고 녹색의 꿈
물론 진보신당 건설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있기도 하다. 진보정치에 대한 충분한 평가와 대안이 모색되지 않은 가운데 섣부른 진보신당 건설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당연한 지적이다. 아직 기층의 많은 이들은 진보신당 건설의 쟁점이나 논의 상황을 잘 알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눈앞으로 다가온 4월 국회의원 총선 대응문제도 쉽지 않은 문제이다. 하지만 진보신당 건설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다. 민주노동당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낀 전 민주노동당 동지들, 10여 년의 역사에서 이제 새로운 전환국면을 맞아야 하는 한국사회당 동지들, 수년간의 초록정치연대 성과를 바탕으로 도약이 필요한 초록당(준) 동지들, 그리고 이를 외부에서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이들까지 이들이 함께 만들어가야 할 진보신당은 단지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이 천명한 ‘보다 적색으로 보다 녹색으로’라는 슬로건으로 국한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헌석/환경센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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