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가지고 있는 철학이나 신앙에 대해 곱씹어 보거나 회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더러 본다. 자기의 철학, 종교만이 제일이라고 여기는 점에서 그들을 동격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타인의 것을 인정은 커녕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독선적인 무리들이 철학이나 신앙의 이름으로 무장하면 해악을 끼침은 두 말할 나위없다. 특히 개신교 신자들 중의 상당 수가 그런 형태를 띠는데 과거 동유럽에 유대인들이 밀집해 있던 아주 폐쇄적인 문화를 형성한 이른바 ‘게토문화’와 너무나 흡사하다. 회의해 보지 않았기에 흔들리면 송두리째 뽑히긴 하지만 그런 고민을 하지 않으려 한다.
▲한국교회는 이랜드 자본에 맞서 싸우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규를 외면하고 있다.
이런 곳에는 토론과 합의 대신 상층부의 지침만이 있을 뿐이다. ‘전체를 위하여’란 말만 통할 뿐 토를 달거나 반론을 제기하는 순간 ‘정의’의 이름으로 사정없이 낙인을 찍어 버린다. 다양성이 통하지 않는 게 아니라 아예 용납을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전혀 주체적인지 않다. 아니, 주체적인 사람들을 싫어한다. 노래도 동음(unison)으로 들으면 지루해 금방 싫증이 나지만 각 자의 소리를 내는 합창(chorus)은 좋은 화음을 들려준다. 각 자의 악기를 연주하는 오케스트라(관현악단)를 보면 각각 다른 악기지만 그 각각의 악기가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준다. 언뜻 보면 따로 노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니라 조화를 이루는 것을 볼 수 있다.
전혀 회의하지 않는 철학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공통점은 맹종과 광신이다. 중앙의 지침이나 상층부의 말에 전혀 토를 달지 않고 오로지 ‘아멘’으로 화답하며 달려갈 뿐이다. 머리 터지게 토론하거나 논쟁해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결과를 내고 결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뒤에서 한 마디 하는 머리 아픈 집단과 비교하면 너무 단정하고 깔끔해 보인다. 그러기에 ‘흔들리지 않는 것’에 대해 유혹을 느끼나 자칫하면 크나큰 실수를 범할 우려가 있음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류투성이인 19세기 언어로 번역한 성서를 붙들고는 ‘일점일획이라도 건드리면 안 된다’고 억지를 부린다. 그렇지만 신학자 안병무는 이런 광신적인 신학 없는 신앙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성서를 향해 끊임없이 질문하라’고 ‘역사와 해석’ 서문에서 주문을 했다. 자신의 철학을 다시 짚어보지 않거나 성찰을 게을리 하면 ‘독선과 아집’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한반도의 남녘과 북녘에 이런 회의하지 않는 집단이 존재하고 있어 머리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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