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목사님
가을의 문턱인 추석이 지나도록 덥던 날씨도 어느 덧 겨울이 되니 계절 값을 하는 걸 보니 자연의 순리를 거역하며 살아갈 수는 없음을 나이 들면서 몸으로 느낍니다. 아마 그래서 하늘의 뜻에 ‘따르는 자는 흥하지만 거역하는 자는 망한다’는 옛말이 딱 맞아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식으로 표현한다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자는 흥하지만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고 할 수 있겠죠. 어떤 것이 하느님의 뜻인가에 대한 논란의 소지는 다분하겠지만요. 어찌 우리네 인간들의 둔한 머리로 그 크신 하느님의 뜻을 다 알 수 없으니 다만 찾아갈 뿐이겠죠.
지난 주 늦잠을 자는 바람에 멀리 가느니 가까운 교회에 가자 싶어 발걸음이 닫는 ××교회로 갔습니다. 문을 들어서는데 ×집사 내외가 문을 고치고 있더군요. 평소 하는 대로 제가 먼저 인사를 했는데 시큰둥한 표정 같아 보여 ‘무슨 사정이 있겠지’ 하며 그냥 들어갔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추수감사절이라 오후에 ‘간증’을 하고 있어 ‘아이구 잘못 왔구나’ 싶은 생각에 앉아 있기가 여간 가시방석이 아니었습니다. 가관이었던 것은 “헌금할 돈이 없어 기도를 했는데 동창회 가서 노래자랑에 1등을 해 30만원 상금을 받았다”며 ‘기도에 응답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졸지에 하느님이 요술방망이로 변해 ‘입장 곤란’ 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시대의 약자인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한 교회에 법무부 직원들이 ‘무단난입’한 사건에 대해 기독교회관에서 항의하는 목회자와 이주노동자들.
전날 따님 결혼을 시킨 헤어진 모 집사님이 전 남편이 ‘다방 하는 여자’와 살았다고 하는 말에 저는 ‘사람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묻어 있음을 느껴 “차이는 얼마든지 인정하되 차별은 용납하지 못한다”는 별난 제 성격 탓인지 심한 거부 반응을 느꼈습니다. 저게 과연 심리치료를 받고,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기독자의 모습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고 했는데 하느님의 사랑을 말하는 사람이 저래도 되는지, 그 말에 모두가 ‘아멘’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가슴이 답답해 오더군요. 분명 예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했는데 그 말이 들어갈 틈을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예수가 간 길을 따라 간다는 것이라고 성서에 수도 없이 적혀 있건만 그렇게도 ‘말씀’ 한 구절 한 구절 읽으며 ‘하나님 말씀’이라고 자구에 얽매여 붙들고 사는 사람들이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정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한다”고 한 예수의 말과 전혀 다른 고백을 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하느님은 요술 방망이처럼 두드리기만 하면 바로 복을 주는 분이 아니라고 저는 성서를 통해 배웠습니다. ‘약자의 짐을 같이 지라’고한 예수의 말을 저는 기억합니다. 이상한 소리(방언)는 아무 것도 아닌 못 알아듣는 말임에도 왜 그걸 대단한 하느님의 선물처럼 받드는지 더 이해할 수 없었다면 제 신앙이 이상한 것인가요?
예전의 잘못된 환경에서 자기도 모르게 몸에 배인 수많은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 역시 생각하고, 그런 상처를 치료하지 않으면 바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렇지만 치료받은 사람들을 바로 그 자리에 머물게 하고, 교회라는 폐쇄된 공간에 자꾸만 가두려 하는 것은 ‘다른 마약’을 투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개신교 신자들의 이러한 폐쇄적인 문화를 비신자들은 굉장히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지 모르겠더군요. 이 부분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교회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자기들만의 천국’에 갇혀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신약성서 중 가장 먼저 기록된 것이 바울 서신이라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문서를 기록한 바울 역시 ‘행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가르쳤고, 천사의 말을 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요란한 꽹과리와 같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개신교 신자들이 그렇게 받고 싶어 하는 방언은 정확히 번역하면 ‘못 알아듣는 소리’임에도 많은 신자들이 무슨 대단한 선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드는 것을 ‘아무 소용없다’고 가르친 사람이 바울임을 알면서도 그 대목은 가리고 성서를 보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특별 은총’이란 말을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성서 어디를 봐도 ‘특별은총’ 비슷하게 표현한 대목은 안 보이지만 ‘약자를 외면하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많더군요. 왜 예수가 수 없이 강조해서 말 하고, 바울이 방점을 찍어가며 가르친 것은 외면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왜곡하려는지 모를 일입니다. 일평생 지병을 갖고 살아갔음에도 오직 하느님의 뜻을 찾아 ‘달려갈 뿐’이라고 한 바울의고백이 요즘 자주 가슴에 와 닿습니다. 하느님을 원망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지금 네 은혜에 만족하라’는 그 고백을 감히 저의 고백으로 받아들이려 한다면 지나친 교만일지 모르겠습니다.
작년 이 맘 때 무릎이 탈 나 수술 전날 수술대에 누워야 할 사람에게 위로는 못할지언정 ‘회개하라’며 아무 생각 없이 비수를 들이대던 그 말을 오래도록 잊지 못합니다. 최소한의 인간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않는 그 말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우긴다면 더더욱 할 말은 없지만요. 청년시절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 정말 천사인 후배는 “진짜 기도는 내 말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들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내공이 깊은 진짜 신앙인의 말이라 제 가슴 깊숙이 심어 놓고 수시로 삶의 거울로 삼고 있습니다. 21세기에 사는 사람들답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며, 그 속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끊임없이 찾아가는 게 신앙인의 참된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 두서없이 떠들고 말았군요.
대통령 선거가 가까워 옵니다. ‘비리백화점’인 장로 대통령 찍어야 한다는 정신 나간 소리 하는 교인들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연말에 그저 거지 동냥 하듯 생색이나 내는 이웃돕기가 아닌 어려운 가운데 정말 힘들게 살아가는 이웃들의 상한 마음을 위로하고, 그들의 아픔에 함께 하려는 분들이 늘어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저도 한계를 극복하고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발전하는 노력 게을리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추위에 건강에 유의하시고 가족들 건강하기를 빕니다.
이곡동에서 윤 희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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