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

재벌개혁, 삼성공화국과 민주공화국?

녹색세상 2007. 11. 26. 19:12
 

이명박, 친기업 아니라 친재벌


  현대자본주의를 유형화하면 영미형 주주자본주의 모델과 유럽대륙형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모델로 대별해볼 수 있다. 어떤 경제모델이든 간에 그것이 순조롭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기업지배구조, 노동시장구조, 금융구조, 하도급구조, 조세구조 등의 하위부문들이 상호보완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그런데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정책기조를 보면, 출총제 등의 재벌규제 완화, 노동시장 유연화, 감세정책 등의 공약은 전형적인 영미형 모델의 요소이다. 반면 금산분리 완화 및 경영권 방어 장치 도입 등의 공약은 유럽대륙형 모델에 가깝다.


  이처럼 양립하기 어려운 이질적 요소가 뒤섞여 있다는 것은, 이명박 후보가 ‘친기업 후보’가 아니라 ‘친재벌 후보’임을 증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재벌들이 원하는 정책은, 그것이 상호충돌을 일으키든 말든, 모두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전적 규제도 사후적 규율도 작동하지 않는 진공 상태의 시장이 꼭 ‘기업하기 좋은 환경’은 아니다. 그것은 소수의 거대재벌만 좋은 환경이다.


  이런 논리적인 수준을 떠나, 최근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삼성공화국의 구조적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명박 후보의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법의 지배’가 노조의 불법파업에만 적용되고, 재벌총수의 불법행위에는 적용되지 않는 이중자대라면, 이명박 후보는 삼성공화국의 임기 5년짜리 고용사장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서울 정동 세실 레스토랑에서 ‘삼성비자금 진상규명과 특검법’ 통과를 주장하는 경제학자들.


삼성공화국의 5년짜리 고용사장


  통합신당 정동영 후보의 정책기조는 참여정부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다. 정책공약상의 표현을 빌린다면 “공정경쟁이 보장되는 건전한 자본주의” 정도다. 이념적으로 평가한다면, 영미형 모델을 기본 틀로 해서 네덜란드, 덴마크 등 유럽 강소국의 유연안정성(flexicurity) 요소를 가미한 정도로 볼 수 있다. 이 정도를 ‘좌파’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나라 보수 진영의 이념적 편협성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정동영 후보의 재벌정책 공약은 지금 좌회전 중이다. 그보다 지지율이 앞선 두 명의 후보가 오른쪽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육강식의 정글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금산분리 유지를 강조하면서 이명박 후보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의 당의장으로서 2006년 지방선거를 치르던 당시 정동영 후보의 입장은 ‘경제 살리기 실용노선’이었다. ‘8.15 기업인 대사면’을 제의했고, 출총제 폐지를 약속했었다. 그때는 열심히 우회전하고 있었다. 정동영 후보는 ‘유연한 실용주의자’다. 대통합민주신당 구성원의 이념적-정책적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의 정책은 언제든지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갈 수 있다. 일관성을 상실한 경제정책은 성공할 수 없고, 그래서 정동영 후보는 성공한 경제대통령이 되기 어렵다.


정동영, 유연한 실용주의-문국현, 구자유주의


  한편,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는 ‘신’자유주의를 강하게 비판한다. 비정규직 위주의 고용 관행, 재벌만을 위한 일방적 규제 완화, 환경을 파괴하는 개발지상주의 등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천박성에 대해서는 권영길 후보에 못지않게 비판적이다. 그러나 그는 통상적 의미의 진보주의자는 분명 아니다.


  오히려 유엔의 글로벌 임팩트(기업의 사회적 책임)나 다보스 포럼의 부패추방운동 등과 같은 ‘구’자유주의(19세기 고전적 자유주의 또는 20세기 질서자유주의 성향의) 프로그램에 대해 강한 열의를 피력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구자유주의자, 이것이 문국현 후보의 이념적 정체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성장률 목표치는 8%로, 모든 후보들 중에서 가장 높다. 그 역시 성장주의의 함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문국현 후보의 재벌정책 공약은 시민단체 의견서의 집대성이다. 출총제, 계열금융기관의 의결권 행사 제한, 지주회사제도 등 이른바 재벌정책의 ‘고전적’ 이슈에서는 물론, 공정위의 전속고발권 폐지,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및 집단소송제도 도입 등의 시민단체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는 단지 ‘합리적 시장’일 뿐이다. ‘구’자유주의자인 그는 거기서 한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다. 반면, 민주노동당 권영길 경제정책 공약은 ‘서민 친구(79) 경제’(서민소득 연 7% 증대, 소득불평등 연 9% 감축)로 요약된다. 이를 실현하는 수단은 한마디로 ‘시장에 대한 국가의 통제’다. 모든 정책공약에 국가의 역할이 핵심요소로 들어가 있다.


권영길, 유일한 진보 후보


  사회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제3의 길’로 들어선 오늘날 유럽의 사민주의 정당보다는 훨씬 더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부유세, 주식양도차익과세, 사회복지세 등의 신설을 통한 증세 입장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는 것은 그가 유일한 진보 후보임을 상징하고 있다. 권영길 후보에게는 출총제 등의 재벌정책의 고전적 이슈는 더 이상 고민거리도 아니다. 한참을 더 나갔다. 특히 ‘기업집단법’ 제정이나 노사공동결정제도 도입 공약은 권영길 후보가 영미형이 아닌 유럽대륙형 기업 모델을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공기업 민영화 및 공공부문의 상업화 등 신자유주의 흐름에 반대하고, 사회공공회계와 공공참여이사회 도입을 주장하는 것 역시 시장만능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진보적 노력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국가를 통해 시장의 폭력성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그 국가의 행위수단인 관료조직의 공공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모피아로 상징되는 우리나라 경제 관료들의 보수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권영길 후보의 진보정책의 성공을 위한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은 대중의 참여를 확대하는 수밖에 없다. 대중에 의해서 대중을 위한 정책을 구현하는 것, 이것이 진보정당의 정체성이다. 이번 대통령선거는 한국사회가 삼성공화국으로 남느냐 아니면 민주공화국으로 혁신하느냐의 갈림길이라고 할 수 있다. 재벌과 관료의 지배를 벗어나 중소기업과 서민을 위한 경제로 탈바꿈하는 것, 이것이 진짜 경제대통령이자 진보대통령이다. (김상조/한성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