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예술

거짓말도 문제지만 학벌주의가 더 문제다

녹색세상 2007. 9. 15. 12:37
 

고비용 저효율 대표적 사례 사교육…입시 없애야 대책 나와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신정아의 관계가 드러나면서 언론, 특히 보수언론은 신이 났다. 신정아의 가짜 예일대 박사학위 문제로 시작된 학력 위조 파문을 자신들이 원하는 구도로 끌고 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8월 31일 중앙일보가 “학벌주의가 아니라 거짓말이 문제다”라는 사설을 낸 것처럼, 이들은 학력위조 파문이 학벌사회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지는 것을 경계해왔다. 이러던 차에 정부 고위관료와 학력위조 파문의 주인공이 그렇고 그런 사이로 밝혀지니 오죽 신났겠는가. 그러면서 ‘린다 김에 버금가네, 변양균 말고 몸통이 따로 있네’등으로 노무현 대통령이나 이해찬 전 총리를 겨냥한 소설을 만들어낸다. 아니면 신정아의 오피스텔 주변 가게 아저씨를 인터뷰하면서 ‘밤에 사간 맥주를 누구랑 마셨을까’라는 별 기사 같지도 않은 걸 쏟아낸다.


“학벌주의가 아니라 거짓말이 문제”라는 보수언론


  심지어는 신정아의 누드사진까지 게재한다. 이렇게 언론은 학력위조 파문을 권력형 게이트, 부적절한 연인이 저지른 이야기꺼리, 관음증으로 만들어간다. 덕분에 한창 이런저런 사람들의 가짜 학벌, 학력이 밝혀질 때, 스스로 고백하였던 이현세, 윤석화, 인순이 등만 이상해졌다. 그런데 보수언론의 기사들 사이에서 재밌는 부분도 발견된다. 신정아는 예일대 박사로 자칭했고 변양균은 예일대 진짜 석사다. 예일대라는 끈으로 두 사람의 만남은 이루어진다. 그리고 변양균 전 실장이 신정아를 도와줄 때에는 변양균의 부산고 인맥 등이 활용된다.


  곧 변양균-신정아를 주축으로 해서 그려지는 조직도는 학벌이나 각종 인맥의 연결망이다. 그래서 먹물들이 좋아하는 학문 사투리로는 “계층 상승 이동하려는 개인과 사회지도층 개인이 사회자본, 특히 학벌을 매개로 관계를 형성하면서 벌어진 사회병리 현상”으로 규정할 수도 있다. 이 측면에서 학력 위조 파문과 사교육비는 만난다. 한국은 학벌사회다. 능력, 잠재력, 인성보다 학벌이나 학력이 중요한 사회다. 사람이 좋거나 능력이 뛰어나도 학벌이 아니면 그걸로 끝이다. 그래서 모두가 SKY(주 :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를 꿈꾼다.


    18세의 승부


  꿈을 이루는 방식은 세 가지다. 일단 만18세에 치르는 시험으로 인생을 결정하고자 한다. 삶 전체를 건 단 한 판의 도박판에 뛰어들고, 대부분은 이 때 승패가 가려진다. 여기서 실패한 사람들, 그러니까 대학을 가지 못했거나 일류대를 가지 못한 사람들은 2라운드를 모색한다. 취업 후 전문대 야간이나 방송대를 가거나 서울의 주요 대학으로 편입 또는 대학원으로 진학하려고 한다. 그래서 만18세의 도박판에서 실패한 상처를 세탁한다. 이것마저도 못한 사람들은 학원가에서 주로 발견되는데, SKY 출신으로 일부 행세하기도 한다.


  그리고 행세하는 것은 학력 위조 파문의 여러 주인공들과 동일한 방식이다. 물론 옳지 않다. 하지만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게 되면 측은하기도 하다. 모두가 만18세의 시험 도박에서 이기려고 하고, 그 중 일부는 2라운드를 모색하고, 이마저 여의치 않으면 속인다. 이렇게 각기 다르지만, 욕망은 같다. 학벌사회에서 살아남기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 욕망은 사교육비를 낳는다. 이미 입시 승리의 필요충분조건인 사교육비를 잉태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사교육비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여기저기에서 불평등한 모습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고비용 저효율’ 구조


  간단히 살펴보면 이렇다. 매월 수십만 원 이상 사교육비를 쓴다. 다 대학보내기 위해서다. 대학도 일류대학을 보내야 한다. 그래야 아이의 삶이 좋아지거나 적어도 나쁘지 않을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막대한 액수를 사교육비로 쓴 다음이다. 입시를 통과해야 하는데, 그것도 가급적 일류대 학벌에 진입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아니 ‘쉽지 않다’는 접대성 멘트일 뿐, 사실 어렵다. “아빠의 경제력과 엄마의 정보력이 일류대 진학을 결정한다”는 말이 바로 옆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교육비를 헛된 일로 만들 가능성이 커졌다. 아무리 벌고 벌고 벌어 돈을 갖다 부어도 아빠의 직업이 별스럽지 않다면, 부모의 학력이 높지 않다면, 아빠와 엄마가 맞벌이를 한다면, 수입이 그냥 그렇다면, 게임은 이미 끝났다고 봐야 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이니 만큼 경제 원리로 따져 봐도, 이건 미칠 지경이다. 비용을 들이지만 효과는 장담할 수 없다. 그렇다고 비용을 줄일 수도 없다. 효과가 보이지 않지만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일까 말까 하는 막연한 기대와 불안을 안고 지불할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입버릇처럼 되뇌이는 ‘고비용 저효율’ 구조가 바로 여기다.


  그 속에서 걱정만 늘어난다. 사교육비 지출로 인한 걱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벌사회와 입시의 틈바구니에서 잘 안 될 수 있다는 불안, 결국 ‘이렇게 살아야 하나’라는 근심만 쌓인다. 그래서 선거철만 되면 교육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나오는 질문이 “사교육비 어떻게 줄일 건데?”이다. 물론 이 질문은 “입시 어떻게 할 건데?”나 최근에 등장한 “교육양극화 어떻게 할 건데?”와 연결되어 있다. 결국은 “나 힘들거든. 너희의 답은 뭐니”이다. 대선이 멀지 않았다. 총선도 코앞이다. 멀지 않아 이런저런 질문들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진다. 이미 물음의 포화를 맞은 곳도 있다. 여기에 민주노동당은 뭐라고 말할 것인가.


입시 없애면 사교육비 사라져


  한 가지만 기억하자. 학벌사회, 대학서열화, 입시경쟁, 사교육비 등의 문제는 예전에도 있었다. 다만, 그 지점이 달랐다. 지금은 대학과 관련하여 벌어지고 있지만, 1974년 이전에는 고등학교에서 벌어졌고, 1969년까지는 중학교에서 볼 수 있었다. 일류중학교와 똥통중학교 식으로 중학교가 서열화 되어 있고, 중학교 입시가 있었고, 당연히 중학교 입시 대비 과외가 극성을 부렸고, 당시 국민학교 6학년을 지칭한 ‘국6병’이 있었고, 잘 사는 집 아이가 일류중학교에 많이 가고 돈 없는 집 아이는 학비 때문에 중학교에 아예 가지 못했다. 이걸 어떻게 해결했느냐. 1969년 중학교 무시험 전형으로 한방에 날렸다. 중학교를 평준화하면서 중학교 학벌, 중학교 입시, 중학교 입시 대비 사교육비, 중학교 진학의 불평등을 해소했다.


  똑같은 해결책이 1974년 고등학교에 적용되었다. 역시 문제는 사라졌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났다. 물론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성공하였던 해결책을 대학 쪽에는 아직 쓰고 있지 않다. 그 대신 지난 50년 동안 대학을 본고사로 가니, 학력고사로 가니, 수능으로 가니, 내신을 어떻게 하니 해서 크게는 16번, 자잘한 것까지 합하면 50번이 넘게 입시 제도를 바꿔왔을 뿐이다. 물론 한 번도 잘 된 적 없다. 1969년과 1974년의 방식은 입시 제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상급학교의 체제를 뜯어고치면서 입시 자체를 없애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방식을 쓰지 않은 채 30년 이상 흘렀다. 동시에 삶은 힘들어졌고, 학교와 청소년 또한 소리 없이 죽어간다. (송경원/레디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