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섭다. 무서워서 못 살겠다. 언제 어디서 누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지, 누가 내 사생활을 까발려서 터뜨릴지 아무도 믿을 수 없다. 이메일도 무섭고 컴퓨터도 무섭다.
한국은 기이하게 공공성이 약한 나라다. 복지 선진국에 비해 훨씬 낮은 세금이 그것을 말해준다. 대신에 살면서 사적으로 부담해야 할 것들은 산처럼 많다. 대표적인 것으로 교육비가 있다. 한국인은 사적으로 교육비 대느라 허리가 휜다. 공교육이라는 공공영역이 무너져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사적 영역이 지나치게 비대한 것이다.
그래서 한국사회는 사적인 자유를 침해하는데도 많은 곤란을 겪는다. 강남 부자들한테 세금 조금 걷는 것도 힘들어 전전긍긍해야 하고, 사립학교 재단을 규제하지 못해 벌벌 떨어야 한다.
그런데 신정아 사태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공공영역이 신정아 개인의 사적인 세계에까지 거침없이 침탈해 들어가고 있다. 나처럼 공공영역의 과소를 개탄하던 사람은 이럴 때 기뻐해야 하나? 그런데 기쁘지가 않고 오히려 무섭다. 무서워서 미치겠다. 숨을 쉴 수가 없다.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이 사적 권리란 보호막 뒤에 숨어 전횡하는 것에는 꼼짝도 못하던 공론장이, 만만한 희생양이 나타나면 벌건 눈으로 악귀처럼 몰아쳐대는 이 이중성이 혐오스럽다.
어떤 사건이든지 사람 사는 세상엔 항상 사건이 터진다. 공론장은 그 사건에서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읽어내야 한다. 그런데 한국사회 주류언론은 신정아 사건 이후 줄줄이 터진 학력위조 사건을 흥미꺼리 터뜨리기 정도로 즐기는 것 같았다. 이 사건에서 사회모순의 본질을 읽어내려는 노력은 별로 감지되지 않았다. 연예인 몇 명 무대 위에 올려놓고 차례차례 까발리고 돌 던지면서 사건을 즐기는 것 아닌가 하는 불쾌감마저 들었다. 언론도 사업이긴 하지만 정보 장사에만 치중하면 곤란하다. 언론은 제4의 권부이며 민주주의의 보루다. 일반 기업하고는 다른 책임이 있다.
학력위조 사건에서 우리가 읽어야 할 의미는 학벌사회의 모순이다. 학벌사회는 사교육비 경쟁을 초래해 저출산, 두뇌유출, 자살 등 나라를 망국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런데 언론은 엉뚱하게 사회 투명성 이슈를 끄집어내서 검증시스템과 윤리성을 문제 삼았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권력형 비리를 문제 삼고 있다. 지금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1990년대 이래 전개된 양극화 파탄과 경제활력 저하지 권력형 비리의 증대가 아니다.
권력형 비리가 있었다면 수사하고 밝혀야 하는 건 맞지만 공론장이 굳이 이 사건에서 힘들여 읽어내야 할 특별한 의미라고는 할 수 없다. 학벌사회가 교육격차에 의한 양극화조장으로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와 직결되므로 언론은 이 걸 문제 삼았어야 했다. 그런데 엉뚱한 것만 문제 삼더니 여기서 한 술 더 떠 신정아와 그 주변 인물의 사생활 정보를 중계하다가 급기야는 알몸 사진을 흩뿌렸다. 신정아가 아직 몸로비를 했다는 증거도 없거니와 설사 그런 사실이 밝혀졌다 해도 일반인 다수에게 그 사진이 보여져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만약 차후에 지금 공개된 사진이 경악할 만한 권력형 비리와 연관됨이 드러난다고 해도, 그것과 별개로 누군가의 극히 사적인 영역이 공론장에 까발려진 사태는 두고두고 규탄 받아야 한다. 이건 테러다. 박정희의 군홧발 테러가 사라지니까 이젠 지면을 장악한 자들에 의한 펜 테러가 난무하고 있다. 누군가가 그렇게 당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당할 수도 있다는 소리다. 자신의 누드를 공개하고 말고 할 권리가 언론에 있는 세상인가? 세상에. 그렇다면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란 말인가? 언론이 내 몸의 주인인 세상인가? 무서워서 못 살겠다. 총이 가니까 펜대들이 목을 치는구나.(다음블로그/하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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