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삿돈 900여억 원을 횡령하고, 회사에 2100억 원의 손해를 끼쳐도 집행유예와 사회봉사명령에 그치는 사법부. 뒤이어 폭행당한 아들을 보복해준다면 조직폭력배까지 동원했어도 ‘부정(父情)’을 내세워 집행유예와 사회봉사 200시간을 내세운 판사. 재벌그룹 회장의 잇따른 집행유예 선고에 대한 비난 여론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현직 부장판사가 법원 내부 게시판에 사법부의 자성을 촉구하는 글을 올려 주목된다. 그는 특히 이번 판결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사법 재량의 한계를 넘는 행위에 대해 법관 징계도 검토될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해 논란이 예상된다.
정영진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는 12일 법원 내부통신망에 ‘사법권 남용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촉구하며’란 제목의 글을 올려 정몽구 현대차 회장과 김승현 한화그룹 회장에 대한 항소심의 집행유예 선고를 비판했다. 정 부장판사는 A4용지 1쪽 분량의 글을 통해 “헌법 규정대로 사법권의 연원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으로부터 유리된 사법권은 생각할 수 없다”며 “다른 모든 권력과 마찬가지로 사법권 역시 남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정 부장판사는 이어 두 사건의 재판부를 겨냥해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사법재량 역시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어 그 재량권의 남용이나 일탈은 법적 책임 추궁의 대상이 된다.” 정 부장판사는 또 “헌법 제103조가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이상 법관은 법적 관점에서 ‘법대로’ 재판을 하여야 하고 정치적 고려 등 초법적 고려를 하여서는 안 된다”면서 두 사건에 대한 판결이 사실상 ‘정치적’으로 이뤄진 게 아니냐는 입장을 간접적으로 피력했다.
정영진 부장판사는 “사법권 독립도 일정한 한계를 가지는 것이고, 법관들의 일탈된 행태를 비호해 주는 방패막이로 작용할 수는 없다”면서 “사법재량의 한계를 넘는 행위는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고, 사안에 따라서는 법관 징계도 검토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 부장판사는 “말로만 ‘국민을 섬기는 법원’, ‘화이트칼라 범죄 엄단’을 외칠 뿐 그 실천이 뒤따르지 못하는 사법 권력은 정직한 권력이 아니다”면서 “사법권 남용에 대하여 법관들과 주권자인 국민 모두의 근본적인 성찰을 촉구하고, 실효성 있는 대책의 수립에 착수하기를 바란다”고 마무리했다.
다음은 정 부장판사가 올린 글의 전문.
▲ 사건만 벌어지면 멀쩡하던 재벌회장들이 휠체어를 타고, 병원에 입원한다.
사법권 남용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촉구하며
법 질서의 최고 규범인 헌법은 그 전문에서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함을 지도이념으로 함을 분명히 하고 있고, 첫 번째 조문인 제1조 제2항에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옴”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헌법 규정대로 사법권의 연원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으로부터 유리된 사법권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다른 모든 권력과 마찬가지로 사법권 역시 남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법재량 역시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어 그 재량권의 남용이나 일탈은 법적 책임 추궁의 대상이 됩니다.
헌법 제103조가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이상 법관은 법적 관점에서 '법대로' 재판을 하여야 하고 정치적 고려 등 초법적 고려를 하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사법부의 행태를 반추하여 보면 과연 법관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법대로' 재판하여 온 것인지, 사법권의 남용은 없었는지 근본적인 성찰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 인혁당 사건 판결, 긴급조치 위반 사건 판결 등에서 보인 사법부의 부정적 행태는 바로 법관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법대로’ 재판하지 않은 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법대로’ 재판한다는 것은 사실 인정에 있어서 형식적으로 자백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더라도 허위자백으로 의심되는 경우 무죄판결을 하여야 하고, 법률적용에 있어서도 형식적, 기계적으로 법 적용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당해 사건에 적용할 진정한 법 규정, 법 원리를 찾아 실질적으로 법 적용을 하는 것입니다. 과거 및 현금까지의 재벌 관련 재판에서 법의 형평성과 관련된 국민적 비판이 제기되어 온 것 역시 법관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법대로’ 재판하여 온 것인지 재검토할 단초를 제공합니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헌법 제11조 정신에 어긋나는 이상 아무리 형식적 법 규정이나 기교적 설명을 제시한다 하여도 국민들은 구구한 변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해당 법관들에 대한 법적 책임추궁에 대하여 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사법권 독립도 일정한 한계를 가지는 것이고, 법관들의 일탈된 행태를 비호해 주는 방패막이로 작용할 수는 없습니다. 사법재량의 한계를 넘는 행위는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고, 사안에 따라서는 법관 징계도 검토될 수 있습니다.
혹자는 인혁당 사건 판결, 긴급조치 위반 사건 판결, 재벌 관련사건 등은 전체 사건의 극히 일부이고 대부분의 사건들은 제대로 재판하였으니 그 일부만을 들어 전체를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재판에 있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법권의 독립, '법 앞의 평등'으로서 극히 일부의 사건을 통하여서라도 법관들의 본질적 사고가 드러나는 경우 나머지 사건들 처리의 적정성마저 의심받을 수 있음을 간과하여서는 안 됩니다.
말로만 ‘국민을 섬기는 법원’, ‘화이트칼라 범죄 엄단’을 외칠 뿐 그 실천이 뒤따르지 못하는 사법 권력은 정직한 권력이 아닙니다. 헌법 전문과 헌법 제11조 등에 규정되어 있는 ‘법 앞의 평등’을 판결로 증명하지 못하는 사법권력 역시 공평한 권력이 아닙니다. 사법권 남용에 대하여 법관들과 주권자인 국민 모두의 근본적인 성찰을 촉구하고, 실효성 있는 대책의 수립에 착수하기를 바랍니다. (오마이뉴스/이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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