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예술

극단적 선교 뿌리는 천박한 미국식 근본주의

녹색세상 2007. 9. 7. 04:54
 

  사십 여일 넘게 연일 뉴스의 머리기사를 장식했던 한국인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가 사실상 종결되었지만, 그 여파는 오래 갈 전망이다.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유가족을 위로하고 두려움에 떨었을 이들을 보듬는 일만 남은 것 같은 상황인데도, 사람을 죽인 탈레반보다 사지에서 고생한 이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더 노골적으로 나오고 있다. 한국 개신교의 일부 행태에 대한 불만이 우리네 마음 속 깊은 곳부터 차곡차곡 누적되어 왔다는 뜻이다.


  언젠가 필자는 4천만 명이 800여만 명의 개신교인을 ‘왕따’시키고 있는 것이 현 한국의 종교적 상황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지금의 상황으로 보면 과장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사실 전문가적 견지에서 보면 이것은 한국에 개신교가 전해지던 당시부터 어느 정도 예견되었던 일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일부 한국 개신교의 선교 형태가 어떻게 해서 지금의 모습을 띠게 되었는지, 그 배타적, 근본주의적 선교 자세의 근본 원인을 좀 더 차분히 짚어보고자 한다.


근본주의적 한국 선교 행위의 뿌리 : 미국식 근본주의


  현대 한국 개신교의 일부 극단적 선교 형태는 사실상 백여 년 전 한국에 개신교를 전해준 미국 선교사들의 행태를 고스란히 빼닮았다. 18-19세기 유럽 지성인들 사이에 과학적 합리성을 중시하는 ‘근대주의’가 유행하고 교회의 권위나 교리적 영향력이 약화되자 미국의 보수적 개신교인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종말론이 번지기 시작했고, 그리스도의 재림 후 이루어지리라는 천년왕국의 건설을 위해 상당수가 선교사가 되어 세계 각지로 나갔다.


  이들은 대체로 진화론을 위시한 과학주의나, 합리성에 힘입은 유럽식 자유주의 신학, 근대적 여성해방운동 등을 경계하고 비판했다. 이러한 흐름을 ‘근본주의’라고 하며, 20세기 초 미국에서 근본주의자라는 말이 처음 쓰이기 시작했다.


  이즈음 내한한 선교사들은 대체로 근본주의자였다. 얼핏 이들 선교 내용은 한국의 오랜 종교 문화적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지만, 나라의 멸망과 일제 강점기를 겪던 상당수 한국인들은 새로운 서양 문물을 통해 근본주의적 개신교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100여년 전 미국에서 생겨나 한국을 비롯해 세계로 수출된 개념이 근본주의인 것이다.


남들과의 분리


  근본주의자는 변화하는 세상에서 불변의 교리를 붙들고자 한다.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분리’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특정 교리 내지 사건, 즉 성경의 무오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예수의 신성성, 대속, 그리스도의 재림 및 성서에 나타난 각종 초자연적 기적들을 신성 불가침적인 것으로 신봉한다. 세속화해가는 사회적 흐름을 경계하면서 금주나 금연 같은, 어느 정도 금욕적인 실천을 통해 무언가 분명하고 일관된 어떤 자세를 견지하고자 한다. 사람들이 잃어버린 초월의 세계를 복구, 유지하려는 것이다.


  물론 특정 교리에 대한 강조나 금욕적 행위 자체에 오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변화를 본질로 하는 인간의 삶이 어떻게 불변의 순간을 붙들고 불변하는 진리를 파악할 수 있겠는가 하는 단순하고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서 지성적으로 답을 하기보다는 신앙적 전제 내지 문자적 교리를 그대로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는 데에 문제점이 있다.


  그리고 그 교리를 붙드는 이들이 일단의 세력이 된 이후에는 타자를 무시하고 억압하는 형태로까지 나타난다는 데에 근본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변화하는 세계를 허망한 것으로, 그 안에서 벌어진 각종 차이들을 정복의 대상으로 간주할 뿐만 아니라, 나를 기준으로 하고 남은 나의 기준에 맞추어져야할 종속적 존재로 간주해버린다. 자기우월적, 타자억압적, 더 나아가 정복주의적 색채를 띠어가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한국 내 일부 극단적인 개신교인들이 이러한 자세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타자와의 차이를 극복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과학적 이성을 한편으로는 소화해서 재창조해야 하는 현실을 거부하고, 도리어 그것을 불경죄로 이단시하거나 몰이성적 언행을 정통주의라는 이름으로 쉽사리 포장하기도 한다.


근본주의의 폐해


  세계 언론의 조명까지 받은 바 있듯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극단적 개신교인들에 의한 훼불 사태, 사찰 방화사태, 우상숭배 논쟁들은 모두 종교라는 것을 차이를 용납하지 못하는 제국주의적 수준에서, 진리의 특정한 ‘표현’을 보편적 진리 자체로 확대하고 전체 역사를 균질화 하려는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서에 대한 문자주의적 이해, 부족신을 넘어서지 못하는 왜곡된 유일신 신앙(사실상의 다신론), 신을 인간의 확대판처럼 보는 신인동형론(anthropomorphism) 등은 그 오류의 전형적인 사례들이다.

  그러나 어찌 타자를 무시하면서 ‘근본’을 추구할 수 있을까. 나를 중심으로 하고 남을 주변에 놓는다면 그것은 선교가 아니라 선전이며 더 나아가 억압이고 폭력이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 그대로 남을 나와 같은 차원에서 볼 때에야 진정한 사랑의 근본주의가 가능하다. 모두를 중심으로 놓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선교가 관광이 되지 않으려면


  ‘선교’는 ‘파견’을 뜻하는 라틴어 missio에서 나왔지만, 중요한 것은 전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선교사들의 황금률, 즉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 28:18-20)는 말이 예수의 말인지 초기 교회의 말인지 구분하기까지 바라지는 않더라도, 제자를 삼는다는 것, 세례를 준다는 것, 예수가 분부했다는 것, 또 가르쳐 지키게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진지하게 소화, 체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알고자 수십 년 이상 박사 공부를 하고 연구를 해도 다 알기 힘든 것들인데, 어찌 단기간에 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더욱이 수직적 신분사회가 아닌, 수평적 평등사회로 급격히 전환되어간 요즈음, 자신의 의견을 전할 때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상대의 말도 들어야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 아닌가?


  다종교적, 다문화적 상황을 중시하는 가운데, 가르치기 보다는 먼저 배워야 한다. 배우면서 네가 이해되고 너에게 동화되며 거기에 겸손과 사랑이 묻어날 때 선교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는데, 알지도 못하고 보이는 것도 없이 어찌 무엇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단기선교’라는 말은 근본적으로 모순된 언어의 조합이다. 단기간에 할 수 있는 것은 가벼운 관광뿐이다. 선교는 인생을 비우고 맡기는 가운데 해야 하는, 아주 오래 걸리는 일이다. 자신이 발견한 진리에 대한 기쁨에 타자에 대한 겸손이 합쳐질 때 제대로 된 선교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 번 더 반성하며


  문제가 되는 일부 근본주의적 선교 자세는 길게 잡아야 150년도 못된, 지극히 ‘근대적인’ 현상이며, 그것도 유럽의 문화에 대해 독자적으로 생존하려는 미국 보수 개신교의 한 지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마당에, 그러한 자세가 마치 태초부터 보편적으로 있었던 것인 냥 착각해온 그동안의 흐름을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사랑의 정신으로 역전시켜야 한다. 진리에 대한, 인간 현상에 대한,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없이 선교란 불가능하다.


  선교는 나의 교리나 신념을 일방적으로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그들이 처한 상황 속에서 더 깊이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존중하며 숨어서 돕는 가운데 내가 변화되는 일이다. 나는 정말 가르침(敎)을 베풀(宣) 자격이 있는지 끝없이 되묻는 가운데 인간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많은 이들이 더 큰 사고 없이 살아 귀국하게 된 것은 그래도 다행이다. (이찬수/종교문화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