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은 족보 검증이 아니라 노비 해방을 고민했다”
경상대학교 정진상 교수가 자전거 전국 일주를 시작했다. ‘학벌철폐, 입시폐지, 대학평준화’를 요구하는 대장정이다. ‘입시폐지 국민운동본부(준)’와 ‘학벌없는사회’가 함께 하고 있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왜 (학력)검증시스템에 대한 관심보다 이 대장정에 대한 관심이 적을까? 정말 이상하다.
검증시스템을 아무리 완벽하게 만들어도 학벌사회의 모순엔 손톱만큼의 타격도 주지 못한다. 한국사회가 말도 안 되게 돌아가고 있다. 기득권층이 모두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학벌사회의 문제가 드러난 사건에 대해 검증시스템으로 답할 순 없다.
어쩌면 학벌사회야말로,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도저히 유지할 수 없는 황당한 체제인지도 모른다. 세상에 10대 후반 국영수 성적이 평생 꼬리표가 되어 사람을 구속하는 기괴한 체제가 어디 있는가? 게다가 그 국영수 성적이란 것을 부모의 돈으로 사는 것이 명백해진 지금에도 학벌사회를 없애는 것에 기득권층 전체가 약속이나 한 듯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정약용이 족보 검증시스템을 주장했나?
조선 후기에 반상(班常)의 법도가 무너졌다. 수많은 노비와 평민들이 양반의 족보를 위조하기 시작했다. 정약용 등 ‘젊은 그들’이 생각한 해결책은 신분제 철폐였다. 그들은 노비를 해방시키려 했다. 족보 검증시스템을 만들자는 따위의 ‘헛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실패했다. 노론 기득권 세력은 구질서를 지키는 것으로 사회혼란에 대처하려 했다. 조선은 패망하고 말았다. 그 노론조차도 족보 검증시스템을 만들자는 따위의 논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사회의 기득권 세력은 지금 조선 노론도 안한 코미디를 벌이고 있다.
우리 후대가 지금의 역사를 보며 웃을 일이다. 한국 사회 기득권층은 모조리 일류 학벌 카르텔이다. 일류 학벌이 언론, 학술, 출판, 행정, 입법, 사법 등 사회공론장 모두를 장악한 나라다. 그들에겐 학벌질서가 무너지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학벌철폐는 신분해방
정진상 교수는 학벌철폐가 기득권 세력에게 청원하는 방식으로는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다고 못 박고 있다. 이것은 왕에게 왕국을 폐지해달라는 청원이 무의미한 것과 같다. 귀족에게 신분제를 폐지해달라는 청원이 무의미한 것과 같다. 일류 학벌이 장악한 한국 사회의 공론장은 학벌철폐 청원에 답하지 않는다.
역사상 그 어느 신분해방도 싸워서 얻어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제대로 된 신분해방은 그렇다. 거저 얻은 신분해방은 지금까지 제대로 작동한 예가 없다. 우린 신분해방을 거저 얻었다. 그리하여 허울뿐인 민주공화국, 사실상의 신민의 나라가 되었다.
대학서열체제는 국민을 신민으로 만들고, 박탈과 차별을 세습하는 신분제의 장치다. 대학서열체제 학벌사회가 유지되는 한, 전 국민이 병적으로 일류 학벌을 열망하게 되고, 이 경쟁은 필연적으로 각 가정의 무한 총력전으로 비화해, 반드시, 반드시 부자가 승리하게 된다. 그리하여 부자가 아닌 일반 국민은 껍데기만 남은 1인1표의 신민으로 전락한다.
대학서열체제에서 지방대는 영원히 서울 명문대를 이길 수 없다. 그리하여 지방은 영원히 3등 국민, 3등 국토를 벗어날 수 없다. 대학서열체제가 지금처럼 작동하면 지방은 3등 국토를 넘어 내부 식민지로 전락할 것이다. 이미 그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대학서열체제에서 노동자와 농민, 어민, 영세자영업자들의 자식은 반드시 3등 학벌의 낙인을 받게 된다. 강남 부잣집 자식들을 귀족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전 국민이 들러리를 서는 체제다. 이 구조의 모순이 드러난 사건에 대해 기득권층은 검증시스템 강화로 화답하고 있다. 한국사회 기득권층의 정신상태가 마치 프랑스대혁명 전야의 귀족과도 같다는 걸 알 수 있다. ‘빵이 없으면 케익을 먹으면 되지’, ‘거짓말 안 하고 열심히 살면 될 것을 학벌 거짓말은 왜 했데?’ 모두 제 정신이 아니다.
학벌철폐는 민주공화국으로의 시민혁명
지금 한국 현대사상 최초로 대학평준화를 요구하는 시민사회의 움직임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 ‘학벌없는사회’라는 일개 단체의 차원에서 벗어나 국민운동본부라는 연대체가 건설되고 있다. 이것은 역사를 다시 쓰는 일이다. 시민혁명은 반드시 공교육을 건설한다. 교육의 기회균등이야말로 신분제 철폐의 관건이기 때문이다. 학벌사회는, 극소수에게만 진짜 고등교육 기회를 제공함으로서 국민 모두의 교육기회를 박탈한다. 대학평준화는 이 나라를 진정으로 신분제가 사라진 민주공화국으로 세우는 일이다.
한국사회 공론장이 제대로 기능했다면 지금 학벌철폐 대학평준화 대장정이 이슈가 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침묵하고 있다. 언제나 그래왔다. 노론도 침묵했고 귀족도 침묵했다. 민중이 일어나 요구해야 한다. 스스로 움켜쥐지 않은 것은 항상 껍데기뿐이었다. 이제 그들이 검증시스템을 만들어 던져 주면 그것 받고 만족해야 하는가? (하재근/레디앙)
'문화 예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극단적 선교 뿌리는 천박한 미국식 근본주의 (0) | 2007.09.07 |
---|---|
학력위조 사건은 학벌사회 철폐로 풀어야 한다 (0) | 2007.09.05 |
강정구는 내쫓고 신정아는 받는 대학 (0) | 2007.08.04 |
이랜드 사태를 보며 진정한 선교를 생각한다. (0) | 2007.08.01 |
3불 폐지 (0) | 2007.0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