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FTA와 대선] 민주노동당만 당론 정해
▲ 8일 서울 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한미 FTA 8차 협상 첫째 날 전체회의에서 김종훈 수석대표와 웬디 커틀러 수석대표가 악수를 나누고 있다.
최근 범여권 대권주자를 중심으로 한미FTA 협상에 대한 비판론이 확산되고 있다. ‘민생정치모임’의 천정배 의원이 물꼬를 텄다. 천 의원은 지난 13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현 상태로는 협상을 중단하고 국민적 논의를 거쳐 차기 정부에서 협상하도록 하는 것이 국익을 지키는 최선의 길”이라고 했다. 천 의원은 그동안 한미FTA 협상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를 보여 왔다. 그러나 명시적으로 ‘협상 중단’을 요구한 건 이때가 처음이다.
이날 천 의원의 발언은 강경했다. 그는 8차 협상까지의 결과에 대해 “협상이 매우 잘못돼가고 있다. 우리가 얻은 것은 없고 내주기만 해 왔다”고 혹평했다. 한미간 고위급 협상에 대해서도 “잘해도 손해고, 못하면 더욱 큰 손해만 남는 결과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냉소적으로 전망했다. 현재로선 ‘협상 중단’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얘기다.
단호한 김근태 “나를 밟고 가라”
같은 날 정동영 전 의장은 ‘현안에 대한 입장’이란 발표문을 내놨다. 여기서 정 전 의장도 현재의 협상 내용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정 전 의장은 “현재 협상이 불평등하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까지 협상내용을 중간 계산하면 ‘마이너스 FTA’였다”고 비판했다. 또 “기간을 정하고 미국의 입장대로 협상이 진행되는 것에 반대한다. 참여정부 임기 내에 협상을 끝내야 한다는 것에 반대 한다”고 했다. 차기 정부로 협상을 넘기라는 천 의원의 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김근태 전 의장도 16일 “한미 FTA(자유무역협정)는 이대로 가서는 안 되며, 다음 정부에 체결과 비준동의를 넘겨야 한다”고 반대 입장을 공식적으로 내놓았다. 김 전 의장의 발언은 단호했다. 그는 “참여정부가 현 기조대로 미국의 시한인 3월말까지 타결할 생각이라면 김근태를 밟고 가야 된다. 분명하고 단호하게 대처 하겠다”고 했다. 김 전 의장은 한미FTA체결지원위원장을 겸하고 있는 한덕수 총리 지명자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시중에 한덕수 총리 지명자가 한미 FTA에 적극적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게 확인되면 (인준에) 반대한다”고 했다. 이밖에 신기남 전 의장은 국민투표를 통해 협정 체결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익’에 부합하는 협상인가?
정동영, 김근태, 천정배 세 사람의 입장 표명은 한미FTA 협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판단해야 할 시점이 다가왔음을 뜻한다. 범여권에서 한미FTA 협상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은 드물다. 김태홍 의원이나 임종인 의원 정도다. 대부분 ‘국익에 부합하는 협상’을 주문하는 입장이다. 그리고 고위급 협상만을 남겨둔 지금, 협상의 결과가 ‘국익에 부합되는지’ 판단해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앞의 대권주자 세 명은 지금까지의 협상 내용에 대해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결론 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13일 국무회의에서 한미FTA 협상 원칙에 대해 “철저하게 경제적인 실익 위주로 면밀하게 따져서 이익이 되면 체결하고 이익이 안 되면 체결 안 할 것”이라고 했다. 협상이 끝나가는 국면에 새삼스럽게 이런 발언을 한 의도를 짐작하기 힘들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앞으로 한미FTA를 둘러싼 대립이 구체적인 협상 결과를 놓고 벌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 지난번 시애틀에서 열린 FTA협상에 반대하는 원정 시위대가 미국 시애틀 연방정부 빌딩
앞에서 ‘FTA 장례식’을 치르며 살풀이춤을 공연하고 있다.
한미FTA를 둘러싼 복잡한 정치지형
한미FTA 협상을 둘러싼 정치 지형은 다소 복잡하다. 당론을 정한 정당은 민주노동당이 유일하다. 반대 당론이다. 열린우리당은 찬반이 섞여 있다. 정동영, 김근태 두 전직 의장은 반대편에 있고 정세균 현 의장은 찬성에 기울어져 있다. ‘통합신당모임’은 한미FTA를 옹호하는 의원이 많다. 물론 이들의 태도는 ‘반노무현’과 ‘친FTA’의 이율배반적 역학 관계에 따라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민생정치모임’은 반대의사를 밝혔다.
한나라당의 경우 아직 당론으로 정하지는 않았지만 찬성 입장이 강하다. 강재섭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 “한미FTA에 대해 적극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 박근혜 전 대표도 미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집권하면 한미FTA만 빼고 현 정부의 정책을 다 바꾸겠다”고 했다. 그렇다고 균일하진 않다. 농촌을 지역구로 가진 의원들을 중심으로 반대 의견도 나오고 있다. 민병두 열린우리당 의원은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 모두 당론 채택이 쉽지 않을 것”이라며 “양당 공히 찬반이 갈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권이 뚜렷한 입장 표명을 않은 채 어물쩍 대선정국을 넘기려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세 번의 변곡점
한미FTA를 저지하려는 입장에선 ‘반대파’ 의원들을 최대한 모아내야 한다. 아직 입장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의원들을 반대편으로 끌어들이고, 찬성 입장을 보이는 의원들을 중립화시켜야 한다. 이번 대선은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간단한 이유다. 한미FTA에 찬성하면 대선에서 표를 잃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면 된다. 이를 위해 두 가지가 필요하다. 먼저 협상에 대한 국민적 관심의 제고다. 둘째, 협상에 대한 반대여론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한미FTA를 이번 대선의 최대 이슈로 만드는 것이다. 정태인 청와대 전 비서관이 “한미FTA는 이번 대선의 최대 쟁점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한미FTA 반대 흐름은 연말 대선까지 대략 세 번의 변곡점을 거칠 것으로 보인다. 먼저 협상 타결을 목전에 둔 현재는 협상 체결을 저지하는 데 투쟁이 집중되고 있다. ‘한미FTA반대범국본’이나 민주노동당 문성현 대표의 단식농성은 이런 노력의 일환이다. 이와 맞물려 이달 말 국회에서는 한덕수 총리내정자의 인사청문회를 계기로 반대파의 1차 공세가 시작될 전망이다.
미국 측 협상 시한인 3월말로 협상 타결이 선언되면 4월부터 6월까지는 협상의 세부 내용을 공개하라는 게 주된 요구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국회에선 한미FTA특위나 통외통위를 중심으로 이런 요구들이 제기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리고 6월 이후 협상이 정식 체결되면 국회 비준을 반대하는 데 투쟁의 중심이 놓일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이런 흐름을 타고 가면서 여론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끌어올리느냐가 관건인 셈이다.
대선의 최대 이슈가 될 것인가?
한미FTA는 이번 대선의 최대 이슈로 떠오를까. 여기에 대해서는 전망이 엇갈린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실 이호성 보좌관은 “한미FTA는 미래비전의 문제이고 대선은 미래비전의 싸움”이라며 “대선의 중대한 이슈가 될 것”이라고 했다. 심상정 의원실 손낙구 보좌관도 “대선의 중대한 변수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와는 다른 전망도 있다.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은 “한미FTA는 아직까지 인텔리와 농민의 이슈에 머물러 있다”면서 “한미FTA에 대한 찬반의 문제가 대선의 표심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홍 소장은 “한미FTA에 반대하는 농민들은 한나라당 지지 성향이 강한데, 한나라당이 한미FTA에 대해 찬성한다고 이들의 표가 다른 곳으로 이동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도 했다. 여론의 추는 팽팽하다. KSOI의 지난달 21일 조사에서 한미FTA에 대한 찬반 비율은 48.3%대 44.8%였다. 노 대통령이 13일 “정치적 부담이 큰 것이 사실이지만 반대는 예측하고 시작한 것이고 지금의 반대도 예측한 수준을 크게 안 넘는다”고 자신감을 보인 배경이다.
다만 협상의 결과가 구체적으로 공개되면서 반대여론의 비율이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이 연구소의 13일 조사에서 협상 체결 시점에 대해 질문할 결과 ‘우리나라의 입장이 충분히 반영될 때까지 체결해서는 안 된다’는 대답이 무려 74.6%에 달했다. ‘충분히 논의됐으니 이른 시일 안에 체결해야 한다’는 응답은 23.1%에 그쳤다. 이는 잘못된 협상으로 판명 날 경우 반대론이 급속히 확산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남북문제냐, 한미FTA냐
외부적인 변수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일각에선 남북문제가 이번 대선의 최대 이슈로 떠오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2.13 합의’ 이후 북미관계가 급속히 진전되고 있고, 이와 맞물려 남북관계도 급진전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가시적 성과가 나올 경우 남북관계를 포함한 한반도 평화의 문제가 대선 정국을 덮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남북관계의 개선과 한미FTA가 미국 주도의 동북아 체제에 남북한이 편입하는 흐름에서 패키지로 묶일 경우 진보진영의 혼선은 물론 ‘전선’의 균열을 가져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분석이다. 때문에 한미FTA를 국민적 의제로 끌어올리기 위한 다양한 실천과 함께 남북관계와 한미FTA를 동북아 질서의 구축이라는 맥락에 놓고 대안적 담론을 모색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미FTA와 선거연합
한미FTA 협상의 체결 여부에 있어 이번 대선은 중대한 변수다. 역으로 한미FTA 협상을 놓고 형성되는 ‘전선’이 이번 대선의 지형을 역규정할 가능성도 있다. 지금종 ‘미래구상’ 대변인은 “한미FTA에 대한 태도는 선거연합의 중대한 기준”이라며 “상반기 중 연합의 대상을 선별하는 과정에서 한미FTA에 대한 입장을 제출하도록 정치권을 압박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범여권을 한미FTA를 기준으로 갈라 세울 필요가 있다”고 했다. 김근태 전 의장 측 한 관계자도 “한미FTA는 정치세력을 묶는 하나의 준거틀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한미FTA에 반대하는 모든 정파가 단일대오를 형성해 협정 체결 저지를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데는 진보진영 내 이견이 없어 보인다. 다만 한미FTA 저지 운동과 대선에서의 연합 문제는 별개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한미FTA 반대 진영의 좌우 진폭이 큰 것을 감안하면 선거연합의 기준은 다른 데서 찾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지적이다. 민주노동당의 한 관계자는 “민주노동당은 한미FTA에 올인 해야 한다”면서도 “한미FTA에 대한 태도만으로 정치권이 재편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레디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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