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적 판단 요청 묵살한 대한수학회... 그럼 어디다 물어보란 건가
거리에서 불량배가 무고한 사람에게 행패를 부리고 있다. 주위 사람들은 안타까워하면서도 선뜻 나서 말리려 하지 않는다. '잘못 나섰다가는 나도 다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처신은 결코 칭찬할 만한 것은 못된다. 그렇다고 비난할 수만도 없다. 다른 사람보다 자기의 안전과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침 그 자리에 있던 경찰관도 '말리려 했다가 한 대 맞을지도 모른다'며 구경만 하고 있다면 어떨까?
만족스런 삶을 위해서는 많은 것이 필요하다. 누구든 자기 혼자서는 그것을 다 구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한 가지씩 나눠 구하기로 약속한다. 이제 그들은 자기가 맡은 것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큰 의무를 지게 된다. 의사는 질병퇴치의 의무를, 군인은 국가 안보의 의무를, 교사는 교육의 의무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크게 지게 되는 것이다. 경찰관 역시 다른 사람들과 달리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불량배를 제지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된다. 이것이 사회의 구성 원리이다.
그렇다면 학자의 의무는 무엇인가? 진리를 탐구하고 그것을 사회의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진리는 그 자체로 인류를 고양시키는 소중한 가치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진리탐구에 나설 여유는 없다. 그래서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은 학자들에게 그 일을 전담시키고, 그 대신 학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지원해준다. 만약 어떤 학자가 아무 사회적 도움 없이 오직 자기 힘만으로 진리를 탐구한다면 그는 재미를 느낄 때에만 공부를 해도 되고 그 결과를 굳이 사회에 알려주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교수처럼 사회적 지원을 받으며 학문 활동을 하는 학자라면, 힘들어도 열심히 진리를 탐구할 의무와 그 진리를 사회에 알려 줄 의무를 지게 된다.
갈릴레이와 대비되는 대한수학회, 진리에 눈감은 점 돌아봐야
최근 학자들이 이 의무를 다했는지 의문을 품게 하는 사건이 생겼다. '김명호'라는 재임용 탈락 교수가 10여 년 전 복직 소송을 냈을 때, 사법부는 올바른 판결을 위해 밝혀져야 할 것 중 하나가 '1995년 성균관대 본고사 수학 문제가 오류를 범한 것인가' 하는 수학적 식견을 요하는 문제임을 발견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우리나라 수학자들의 대표격인 대한수학회에 의뢰했다. 그런데 당시 대한 수학회는 입시나 재임용 문제에 개입한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이 문제에 대해 답할 수 없다'고 회신했다고 한다.
여기서 사법부는 공무 집행을 위해 우리 사회를 대표해 대한수학회에 그 물음을 던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대한수학회는 대답을 회피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대한수학회에서는, 사회에서 이 문제를 누구에게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궁금하다. 사업가에게? 회사원에게? 소방수에게? 그들은 수학에 대한 전문적 식견이 없으며 그들 자신이 맡은 사회적 소임을 다하기에도 바쁘다. 아니면 수학교사나 학원 수학 강사들에게 묻기를 바랐는가? 하지만 수학적 진리탐구를 위한 지원을 훨씬 더 많이 받고 있고, 또 수학적 진리와 관련해 가장 권위 있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집단은 바로 대한수학회이지 않은가.
우리들은 이 사회가 누구의 권리도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 정의로운 사회이길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소송에서도 정당한 권리가 있는 쪽이 승소하길 원한다. 그런데 대한수학회에서 답변을 거부함으로써 사법부는 공정한 판결을 위해 꼭 알아야 할 사실 중 하나에 대해 확신할 수 없게 됐다. 사법부가 사실판단 부족으로 잘못된 판결을 내릴 가능성이 더 커졌던 것이다. 이것은 대한수학회의 침묵으로 우리사회의 어떤 구성원이 부당하게 권리를 침해당할 가능성이 더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한수학회에서 당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여러 '불편함'을 걱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답변을 거절해도 원망을 듣겠지만 답변했을 때 듣게 될 핀잔, 원망, 인간관계의 껄끄러워짐 등이 더 크게 작용할 것이라고 우려했을 것이다. 우리 사회 깊이 뿌리 박고 있는 침묵의 카르텔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즉 자신들에게 이익 될 것이 없다는 생각에, 진실 말하기를 거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사회 구성원들은 적어도 자기가 맡은 사회적 임무에 대해서는 상당한 정도의 어려움과 불이익도 무릅쓰고 그 임무를 다해야 한다.
대한수학회 홈페이지를 보니 회원들의 수학에 대한 사랑과 수학발전, 국가의 교육과 발전에 대한 사명감이 언급돼 있다. 한 사회에서 수학이 발전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세계적 저널에 우리 수학자들의 논문이 몇 편 더 실린다고 우리 수학이 발전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중에 어떤 분쟁이 생겨 해당 논문들의 내용이 옳은지 대한수학회에 물어보면, 그들은 '답변 불가'라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우리나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수학자 집단이 옳다고 보증해 줄지 확신할 수도 없는 논문들을 어떻게 우리 수학의 발전을 보여주는 증표라고 내세울 수 있겠는가.
한 사회의 수학 발전 정도를 재는 중요한 척도 하나는 그 사회 구성원들이 수학적 진리 중 어느 정도를 옳다고 확신하며 공유하고 있는가일 것이다. 이런 척도에서 봤을 때 우리나라 수학의 발전 정도는 1995년도 성균관대의 그 본고사 문제가 옳은지 그른지도 명쾌하게 판가름할 수 없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 셈이다.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굽히지 않다가 화형에 처해질 위험 앞에서 할 수 없이 이 주장을 철회한다. 그러면서 혼잣말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읊조렸다고 한다. 한 학자의 진리에 대한 투철한 정신, 그러면서도 죽음 앞에서 굴복할 수밖에 없는 그 고뇌 속에서 인간의 약함과 위대함을 동시에 느낀다. 대한수학회는 그들이 평생 추구하는 진리와 관련해 과연 어떤 지점에서 입을 다물었는지 돌이켜봐야 할 것이다. (오마이뉴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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