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과 인권

사랑이라는 이름의 일방적인 희생

녹색세상 2006. 10. 8. 21:40

   사랑이란 이름으로 전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방적인 희생을 우리 어머니라는 여성에게 강요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새벽밥 먹고 현장으로 출근해야 하고, 장기간의 지방 출장도 있는 건설업의 특성상 어머니가 안 계신다면 제 딸은 고아 아닌 고아가 되고 말았을 겁니다. 당 활동에 조금 나가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선택조차 고민할 수 없는 일방적으로 짐을 질 수밖에 없는 어머니라는 여성이 뒤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죄인이기에 어머니와 아이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핏줄은 절대 버리지 않을 테니 걱정 마라”고 하시기에 고맙기 그지없긴 하지만 당신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손녀 사랑’을 할 수밖에 없는 강요된 현실임에 분명합니다.

 

  저희 남매는 2남 2녀로 제가 맏이고 두 살 아래 여동생과 바로 아래의 남동생, 여섯 아래인 막내 동생이 있습니다. 살기 어렵든 시절 사 남매를 다 공부시킬 형편이 못 되자 그래도  ‘아들만은 대학가야 사람 구실을 한다’며 여동생들은 청소년기부터 자신들의 꿈을 접으며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학 구경이라도 하고 책 몇 줄 읽은 덕에 우리 사회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여동생들이라는 여성들의 일방적인 희생 덕분이었습니다. 고민하며 살아갈 때 우리 형제는 여동생들 얘기만 나오면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자신들이 희생하면 번듯하게 살 줄 알았는데 우리 형제가 이상한 방향으로 가자 “이럴려고 우리들이 희생당한 줄 아느냐”는 원망을 들을 때마다 할 말이 없어 슬그머니 사라진 게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집안에서조차 그렇게 여성들의 고통을 딛고 자라왔고, 지금 역시 양육이라는 무겁디  무거운 짐을 일흔 넘은 여성에게 지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이들 때문에 하고 싶은 활동 제대로 못하는 여성 동지들을 보면서, 상근 활동을 하며 아이들을 키우는 여성 동지들을 대할 때마다 헌신이 아닌 희생이라는 여성들의 고통을 딛고 살아가는 저로서는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른 보수 정당에 비해 당내 민주주의가 비교적 잘 확립되어 있다는 우리 민주노동당이긴 하지만 여성들이 당 활동이나 정치 활동에 깊이 참여하고 지도부에 들어가기에는 현실적인 장벽이 엄청나게 존재하고 있으나 남성들은 그 문제를 잘 알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깨 너머로 배운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여성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전에는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성 문제에 대해 공부하고 여성운동가들과 함께 학습하면서 어슬프게 관념으로만 알고 있던 시혜적이고 오만한 여성문제에 대한 시각은 무참히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의 절반인 여성들의 삶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남자들 역시 행복할 수 없다”며 수시로 떠들어 댄 것은 체화 되지 않은 여성관에서 나온 건방진 말이었습니다. 이제 그 시각을 바꿔 모든 여성 문제를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노력을 이어가려 합니다. 지난 기간 어머니에게 일방적으로 맡겨 놓기만 했던 딸의 양육에 대한 짐도 가벼이 해 드리려 합니다. 아니 당연히 해야할 저의 몫입니다.

 

   “이 땅의 민주화 운동 세력은 여성들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다”는 어느 여성학자의 말과, “진보 운운하는 사람들은 여성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 역사 발전을 절대 말하지 마라”는 선배의 부인께서 하신 말씀이 가슴에 팍 꽂힙니다. 이제 조금씩 철이 들어가려나 봅니다. 온갖 어려움과 가족과의 갈등, 시댁과의 마찰을 감수하면서 여기까지 달려오신 여성 동지 여러분! 정말 뜨거운 연대의 의지를 담아 힘찬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