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과 인권

성폭력에서 생존자들에게 지지를!

녹색세상 2007. 2. 6. 14:01

☞짐승 같은 놈

 

‘인면수심’이라는 단어가 있다(유사한 것으로는 ‘금수만도 못한’). 인간의 얼굴을 했지만 동물의 마음을 지녔다는 뜻이다. 솔직히 말해서 동물의 마음이 어떤지 알도리가 없는 인류가 왜 이 단어를 나쁜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의 언론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주로 이런 식이다.


  “인면수심 의붓아버지, 딸 10년 동안 성폭행”


  아무 잘못도 없이 매도된 수많은 동물들에게 다시 한 번 미안한 마음을 표하며, 가만히 생각해보자. 왜 하고많은 욕 중에 하필이면 인면수심이라는 단어가 선택된 걸까? 성폭력이라는 것이 끓어오르는 욕정을 이기지 못해서 인간성을 버리고 다시 동물로 되돌아간 자들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라는 이야기일까?

 

  나 역시 동물들의 세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세계에서도 성폭력이 존재하는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은 동물성도 무엇도 아닌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행위이라고 생각한다. 인면수심이란 단어는 실은 엄청나게 ‘정치적’으로 채택된 용어다. 즉 이러한 일들은 ‘동물’의 영역이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서, 인간들의 사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발뺌하는 것이다. 하지만 통계에 의하면 가해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늦은 밤 혼자 귀가하는 여성을 노려보는 변태성욕자가 아닌, ‘아는 사람’이다. 직장동료, 가까운 친척, 혹은 친아버지, 옆집아저씨, 선생님 등 그야말로 ‘인간적’인 이들에 의해서 때로는 몇 십 년에 걸쳐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는 행위를 어떻게 ‘동물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XX를 잘라버려!

 

 

 

 

 

  그런가 하면, 이 인간적인 사건들을 바라보는 다른 인간들의 반응역시 지나치게 ‘인간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성폭행기사에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들 역시 대부분 남자들이다. 그들은 흥분한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드리며 하나같이 이야기 한다. ‘저런 놈들은 XX를 잘라버려야 되!’ 그러나 이 단세포적인 반응에 마저도 또 하나의 진실이 존재한다. 짐승들을 공격함으로서 나의 ‘인간다움’을 확보하려는 것, 자신의 삶 혹은 자신의 섹스가 일련의 성폭력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것, 일종의 ‘인간선언’이 폭발적인 분노의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그들의 분노가 모두 이런 정치적 계산에 의한 것이라 매도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인면수심 아버지에게는 돌을 던지면서도, 직장 내 성희롱 방지규정에는 난색을 표명한다. 또 피해자가 10대의 소녀에서 20대 여성을 지나 고령으로 올라갈수록 리플들에는 기름기 가득한 농담성 댓글들이 등장한다. 사건의 정황이 ‘완벽한’ 폭력으로 보이지 않는 경우에는 당연하게도 ‘화간’이나 ‘꽃뱀’이라는 추측이 난무한다.

 

  이러한 일련의 반응들은 성폭력의 범위를 매우 협소한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될수록 폭력은 ‘저기’에 있게 된다. 마치 머나먼 중동 땅에서 떨어지는 폭탄들을 TV화면을 통해 접하는 것만큼의 거리에 성폭력이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그저 TV나 신문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만 같은 그런 일들을 관망하면서, 유영철도, 발바리도 아닌 많은 이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분노할 수 있게 된다.

 

☞넌 얼굴이 무기야


  그러나 여자들에게 있어서 성폭력은 언제나 ‘실존하는 위협’으로 존재한다. 과연 한국사회에서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한 번도 당해보지 않은 여자가 존재하는지 궁금할 정도로 그것은 일상적인 경험이며, 강력범죄 중 강간이 최저의 신고율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TV나 신문에 나오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피해자’와 ‘피의자’가 있다는 소리다. 여자 친구들에게 ‘조심해서 들어가’라는 인사를 할 때마다 이것도 여성의 '피해자성'을 내면화하는 인사말이 아닌지 생각하게 되면서도, 늦은 밤에 으슥한 골목을 지나가야 하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진심을 담아 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어쩌면 이 사회가 처한 상황이다.


  성폭력에 관한 지겨운 오해 중에 하나는 그것이 여성의 노출이나, 성적매력에 따라 표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가정이다. 그러나 노출이 많을 수밖에 없는 여름과, 상대적으로 노출이 적은 겨울을 비교해봤을 때 그 두 계절사이에 뚜렷한 차이가 없다는 것, 또 성폭력이 점점 장애여성이나, 취약계층여성에 대해 중점적으로 가해지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예전 한나라당의 최연희의원의 성추행사건이 벌어진 이후, 열린우리당의 한광원의원은 초당적인 마인드를 발휘해, ‘아름다운 꽃을 보면 다가서서 만져보고 싶은 것이 자연의 순리’라며 최연희의원을 두둔했다. 진정으로 ‘풍류를 아는 사내대장부’라고 칭찬해주고 싶지만, 당최 만져지는 꽃은 무슨 죄인가? 꽃의 의사는 개 무시하고 지네들끼리 자연의 순리 따위의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 다른 곳도 아닌 ‘국회’에서 가능하다는 것은, 사람을 ‘식물’ 취급하면서 함부로 ‘만져’왔던 이 사회의 ‘시대정신’의 일면은 아닌가?


  과거 법정에서는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여성이 자신이 강간을 당하면서 성적으로 흥분을 하거나, 쾌감을 느끼지 않았음을 ‘증명’해야 했다고 한다. 지금도 신문기사 중에는 경찰조사도중 불쾌감을 느낀 성폭력피해자들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올라온다. 가해자에게는 '본능'이라는 명쾌한 이유를 먼저 붙여놓은 뒤, 피해자에게서 어떻게든 ‘원인’을 제공한 혐의를 찾으려는 괴상한 시도가 성폭력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의 시각 속에 존재한다. 물론 소위 말하는 ‘꽃뱀’과 같은 식의 의도적인 접근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짧은 치마를 입든, 눈앞에서 스트립쇼를 하든, 혹시라도 경범죄에는 해당될지언정 함부로 해도 좋다는 뜻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돼요, 돼요, 돼요....” 따위의 저질 농담이, ‘여자의 심리’로 정립되고, ‘싫어’를 ‘싫어’로 듣지 못하고, ‘안 돼’를 ‘안 돼’로 듣지 못하는 고집스러운 예단과 착각이 사회전반을 아우르며 소통불가의 장벽을 쌓고 있다.

 

 

니 인생은 끝났어!

 

  그러나 이러한 예단은 단지 의사전달과정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성폭력의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사회는 ‘완고한’ 동정을 징그럽게도 이어나간다. 성폭력이 한 개인에게 크나큰 상처와 고통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피해자들을 위한 사회적인 지원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유독 성범죄의 피해자는 “인생이 망가진, 혹은 끝장난” 사람 취급을 받아야 한다. 피해자의 고통을 안타깝게 여기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제 너는 끝이야’라는 사형선고를 손수 내려주는 이상한 시선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지만그들이 그 처참한 폭력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것이 아니던가? 그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언제든지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누가 어떤 권리로 그들의 삶에 대한 권리와 애착을 포기하도록 할 수 있단 말인가? 왜 단지 희생자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보태준 것도 없는 이들의 손에 이끌려 천덕꾸러기가 되어야 하는 걸까? 


  어떤 여성이 자신을 강간하려는 사람에게 콘돔을 건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그녀는 생과 사의 경계에서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다. 혹자는 ‘왜 저항하지 않았는가?’ 라는 물음을 던질 수도 있다. 하지만 섣부른 저항은 곧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여성들에게 ‘왜 당신은 논개가 되지 않는가?’라고 묻는 것이야 말로 더 거대한 차원의 폭력이 아닌가? ‘피할 수 없는 강간은 즐겨라’라는 말은 단순한 위로용 멘트가 아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폭력으로부터 ‘살아남으라’는 이야기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타인에게 해를 끼친다면 그것은 좀 더 고민이 필요한 문제겠지만, 나에게 가해지는 폭력으로부터 살아남는 것에 대하여 그 어떤 고매한 도덕이 비판을 가할 수 있단 말인가?

 

 드가 (Degas 1834~1917) <강간>

 

  살아남은 이들에게 지지를


  오늘도 많은 여성들이 성폭력으로부터 살아남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일상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체념’을 하면서 살아가고, 그것이 누군가의 눈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서 가만히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 일지도 모르겠지만, 내 몇 안 되는 지인들의 경험담만을 모아 봐도 오늘 쓴 것보다 더 긴 글이 충분히 나올 정도로 성폭력의 위협은 빈번하게 발생한다.


  어떤 여성단체에서 ‘안전한 밤길을 다닐 권리’를 주장하는 행사를 한 적이 있다. 워낙 무서운 세상 이다보니 누구에게도 안전을 장담 못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여자와 밤길의 사이는 아무리 밤길을 거니는 사람들이 많아져도 좀처럼 편안해지기 어려워 보인다. 이 둘의 불편한 관계가 회복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할까? 성폭력에서 살아남은 이들에게 지지를 보낸다. 그들은 용감하게 살아남았고, 그러므로 앞으로도 용감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남로당(www.namrodang.com )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