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과 인권

[야! 한국사회] 밥상의 권력

녹색세상 2006. 10. 3. 21:00

    

  당연한 말이지만, 명절이 가까워지면 자고로 인간에게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동서양 여러 종류의 제사란 양을 바치든 과일을 바치든 대부분 식사의 모방이고 재현이다. 기독교의 성찬식은 최후의 만찬의 모방이고, 유교의 제사 역시 조상신을 모셔놓고 사람이 밥 먹는 순서를 고스란히 따라가며 재현하는 행위다. 대접받는 신 앞에서 ‘드시죠’ 하는 것을 누가 하느냐는 산 사람들의 권력관계에서 결정된다. 사제·제주는 그 밥상에서 엄청난 권력을 행사한다. 종갓집에서 자란 내 기억으로는 명절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당연히 여자의 몫이나, 다 조리된 제수를 차례상에 괴는 일은 남자들의 몫이었다. 여자는 ‘숭늉 들여라’ 하는 호령 소리에 ‘네’ 하고 갖다 바치는 일이나 한다.


  지금도 단합과 친교를 하는 일은 으레 밥을 함께 먹는 일이며, 이 자리를 주관하는 자의 권력은 막강하다. 기관장이 회식하자는 데 결석하는 강심장은 흔치 않다. 정말 밥 먹는 일로 단합이 이루어지는지 알 수 없으나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근대적 계약관계나 논리를 뛰어넘는, 육체와 물질을 함께 하는 유대감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그 자리에서 함께 밥 먹는 자들이 모두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믿음은 늘 웃어른의 몫이다.


  교회에서는 예배가 끝난 뒤 밥을 함께 먹는 경우가 많다. 요즘처럼 음식 흔하고 시간 바쁜 세상에, 밥 먹는 것처럼 번거롭지 않은 다른 방식의 친교를 생각해 봄직 하건만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도들이 함께 밥 먹는 그 모습이야말로 목사님들에게는 ‘보시기에 좋은’ 광경이기 때문이다. 가족에서도 마찬가지다. 분가하여 흩어져 있던 아들·딸·손자들이 명절이나 생일 등에 모여서 하는 일이란 오로지 함께 먹는 일밖에 없으나, 부모들은 그것을 그토록 흐뭇해한다. 당신들이 주도하여 자식에게 무언가를 베풀고 있다는 것, 그 속에서 자식들이 하나가 되는 듯한 모습을 보는 즐거움이 아주 큰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수평적 대화와 소통이 힘든 집단일수록 함께 밥 먹는 행위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물론 밥을 같이 먹으면서 풍부한 대화가 가능해지기도 하지만, 그 밥상머리 대화가 늘 대화답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구성원들끼리의 실질적 단합이 약한 상태에서 밥상머리 대화는 늘 웃어른의 훈시라는 권력의 언어로 정리가 된다. 가족 안에서도 아이들에게 잔소리하는 자리는 꼭 밥상머리다. 그러니 먹을 것 흔한 세상의 요즘 아이들이 부모와 밥상머리에서 함께 앉기 싫어한다.


  그 식사를 가능하게 하는 일은 늘 여자의 몫이다. 밥상 권력의 만족감은 남자의 몫이지만, 그 뒷바라지는 죽으라고 여자가 한다. 목사님이 보시기에 좋은 광경을 만들고자 죽어나는 것은 수백 명의 밥을 짓는 여신도들이고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이들의 만족이란 아주 미미하거나 없다. 물론 이 안에서도 권력행사의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기는 하다. 여자들의 웃어른이다. 시어머니는 일 년에 몇 번, 며느리들을 데리고 대장 노릇 하는 권력의 즐거움을 누린다. 그러나 바로 이 권력적 속성 때문에, 우리의 명절은 위기를 맞고 있다. 명절증후군이 생기고, 아예 아이들만 데리고 여행을 떠나버리는 젊은 부부들이 늘어난다. 명절에 즈음하여 며느리들이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은(요즘은 그 눈치 보느라 남편과 시어머니조차 스트레스가 쌓인다) 그저 이틀 동안 부엌 일 하기가 싫어서만은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