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

과한 추모 분위기

녹색세상 2018. 7. 31. 16:05

몇 일 전 발을 다친 후배에게 경험한 걸 몇 마디 전해 주고 나니 99년에 일어난 첫 산재사고가 생각난다. 내 생애 첫 사고이자 산업재해이기도 한데 고2때 사관학교를 가겠다고 운동을 시작해 몸이 건장했다. 그냥 근력만 키운 게 아니라 줄넘기를 3~4천 개는 뛰고 근력운동을 했으니 단순한 근육질 몸만은 아니었다.

 

최루탄 마시고 돌아다닐 때도 몸이 튼튼해야 싸움도 잘 한다는 생각에 일주일에 4~5일은 헬스클럽에 꼭 갔다. 사고 나기 전까지는 산에 가도 뒤에 처지는 사람 챙기는 게 귀찮아 늘 혼자 갔다. 그래야 맘껏 뛰어 다닐 수 있으니. 병원도 거의 안 갔다. 결혼 후 가을에 접어들 무렴 알레르기성비염을 심하게 앓으면서 병원에 처음 갔던 게 처음이었을 정도니. 체력만 믿고 까분 시절이었다는 걸 40대가 되면서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던 나에게도 사고란 게 다가왔다. 평소 얼마나 조심하고 사고 대비를 철저하게 하는데 왜 이런 게 오는가 의아해 원망까지 했던 것은 사고 후 신체 균형이 급격하게 뒤틀리면서 심하게 앓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알고 보니 마흔을 전후해 몸의 변화가 있기 마련인데 그냥 개인적인 문제로만 머리 싸맸다.

 

운이 안 좋아 양쪽 무릎 연골 수술도 했다. 건강보험 비 급여 항목이라 비용도 만만치 않았지만 남들보다 치료 효과가 빨랐던 건 10대부터 시작한 운동 때문이었다. 재활치료가 운동을 변형한 것인데 평생 운동 안 하고 살아온 사람들은 몸의 균형을 못 잡아 비지땀을 흘렸지만 나는 몇 번 안 해서 바로 적응이 되었다.

 

어쩌다 발 들여 놓은 건설현장에서 폭염에도 버틸 수 있었던 건 몸이 견뎌 주기 때문이었다. ‘욕이 뭐 따고 들어오느냐며 천하태평일 수 있었던 것도, 일하는 동료가 다쳐 피를 막 흘려도 태연히 응급조치 하고 구급차 태워 보낼 수 있었던 건 역시 마찬가지다.

    

 

 

99년 첫 사고 후 해마다 사고가 겹치면서 급기야 외상 후 장애와 공황장애, 우울증과 불면증이 겹치면서 죽고 싶기도 했지만 다치지 않고 살아 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며 나를 돌아본다. 보나마나 몸이 따라 주지 않아 처지는 사람을 보지 못하고 의지가 있느니 없느니 하면서 남의 가슴에 대못을 사정없이 박는 냉혈한이 되지는 않았을지, 할 수 있다.’는 이상한 정신에 사로잡혀 있었다.

 

노회찬의 안타까운 죽음 후 제대로 된 사망기사는 안 보이고 추모를 넘어서는 지나친 분위기를 노회찬 현상운운하는 게 너무 불편하다. 비숙련공은 이 폭염에 종일 땀 흘려 겨우 10여 만원 벌고, 기능공 일당이 18만원인데 강연료가 2천만원이란 말에 할 말을 잃었다. 노회찬의 죽음에 이성을 갖고 대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