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진 뒤 읍내로 장 보러갔다 왔더니 어느 친구가 ‘무(모)한도전을 했다’고 하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저도 아찔합니다. 6월 10일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한 ‘6.10항쟁 기념일’이기도 해 집회에 가서 반가운 얼굴도 볼 겸 해서 대구로 향했습니다. 오랜만에 사람들 만나다 보면 늦을 것 같아 막차를 타고 올 작정을 하고 20킬로미터가 넘는 읍내까지는 자전거로 갔습니다. 재를 3개나 넘어야 하는데 다행히 바람이 불지 않아 별 고생하지 않고 읍내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병원을 3군데나 들러야 하는지라 머뭇거릴 수 없어 어디부터 먼저 가는 게 좋을지 순서를 잡았습니다. 몇 일 전 플라스틱 상자에 상추를 옮겨 심느라 부엽토를 몇 자루 퍼 오느라 삐끗한 허리 때문에 들러야 하는 제통의원, 6년 넘게 고생하는 불면증 때문에 아직도 약을 먹어야 하는 처지라 3주 마다 정신과에 가는 날입니다. 거기에다 작년 10월에 치아 신경 치료만 해 놓고 덮어씌우는 걸 그 동안 미루었는데 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몇 일 전 잠시 낮잠을 자다 치아가 부러지는 꿈을 꾸다 깬 적이 있어 더 이상 미룰 수 없더군요. 불면증은 2004년 3월 말 발견 후 지금까지 그냥 자 보지 못했습니다. 약 안 먹고 그냥 편하게 잠자리에 드는 게 소원입니다. 정신과는 환자 보호를 위해 원내 처방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아는 의사로부터 처방전을 받아도 약국에서 약을 구할 수 없으니 직접 가야 됩니다. 누우면 바로 자던 천하태평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읍내 장 보러 가는 마트 앞에 자전거를 잠 구어 놓고 대구행 버스를 탔습니다. 제가 소속된 당의 홈페이지에 일정표가 안 보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상근하는 후배에게 전화를 했더니 ‘행사는 13일 두류공원 야외 공연장에서 한다’고 해 오랜만에 볼 반가운 얼굴들을 지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해 가장 먼저 가야할 병원을 잡았습니다. 제통의원과 정신과가 가까이 있어 다행이죠. 아픈 사람은 왜 그리 많은지 점심시간인데도 대기실이 만원이더군요.
건강보험 체계가 행위별 수가제라 의사들은 동시에 두 가지 진료를 하지 않으려 합니다. 의료가 상업화 된 구조적인 탓이니 의사를 나무할 일만은 아니죠. 통증을 잘 잡는 의사라 급한 통증이 생기면 가곤 합니다. 치료를 마치고 불면증약을 받으러 정신과로 갔습니다. 복용 약물을 최대한 줄이기는 했으나 더 이상 줄이는 게 한계가 있어 저로서도 난감합니다. ‘왜 내가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느냐’는 원망이 들 때도 있지만 벗 삼아 지냅니다.
노무현 정권 때 장관을 지내고 모 공단 이사장을 지낸 선배가 새로 개원한 치과로 갔습니다. 다시 치과를 한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얼마 전 문상을 갔다가 위치를 알았습니다. 비록 서로 가는 길은 다르지만 오랜만에 얼굴도 볼 겸 가벼운 주머니 사정을 복합적으로 고민해 판단을 내렸습니다. 사실 장관하거나 다른 자리에 있으면 보기 힘든데 하방을 한 탓에 얼굴을 보게 된 것이죠. 전국구 마당발인 이수성 못지 않은 대구 바닥이 알아주는 마당발입니다.
신경 치료가 되어 있는데도 보철 치료에 시간이 많이 걸리더군요. 틀을 뜨고 진료 날짜를 잡았습니다. 제가 처음 가는지라 그냥 보내야 할 환자인지 구분하는 게 접수를 담당하는 직원의 임무이기도 합니다. 구청장을 지내면서 인심을 얻은 탓에 나이드신 분들이 편하게 치료받으러 온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주머니가 빈 사정을 아는지 ‘원장님이 반 만 내시라고 한다’는 직원의 말에 바로 통장 번호를 적어 달라고 했습니다. 이럴 땐 잽싸게 처리하는 게 최고지요. ^^
‘오랜만에 보는데 저녁이라도 같이 하자’는 후배의 정성이 고맙기 그지없지만 그러다 보면 너무 늦어질 것 같아 ‘다음에 막걸리 한 잔 하자’며 문자를 보내고 시외버스를 탔습니다. 허기져 김밥을 먹었지만 군위읍에 도착하고 보니 허기져 20킬로미터를 자전거로 달릴 자신이 없어 막걸리 한 병을 챙겨 바로 옆에 있는 분식점에 가서 몇 가지를 챙겨 먹었습니다. 출출할 때는 막걸리가 그만이죠. 8시 30분이라 어두워졌지만 자전거 타기 딱 좋더군요.
전조등과 후미등을 확인하고 야광조끼를 입고 자전거에 몸을 실었습니다. 첫 번 째 재를 넘으면 골프장이 있고 얼마 안 가 양돈장이 있어 한 밤에도 냄새가 코를 찌르는 곳을 지나가야 합니다. 빨리 도착해야 하니 부지런히 페달을 밟지만 낮 보다는 못하지요. 하천 옆을 지나니 하루살이가 괴롭히더군요. 안경을 끼고 가벼운 마스크를 해 코나 입으로 들어오지는 않았습니다. 마을 가까이에 있는 언덕을 넘어서자 안도의 한숨을 쉽니다. 이 정도면 무(모)한 도전이 아닌지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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