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스승의 날 떠오르는 은사님들이 있습니다.

녹색세상 2010. 5. 16. 22:07

선생님, 저는 어떤 학생이었습니까?


학창시절 저는 특별히 뛰어난 구석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공부를 유난히 잘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많은 은사님들이 저를 기억하고 지금도 인사를 드리면 반갑게 받아 주십니다. 교직에 있는 친구나 후배들에게 ‘어떤 학생이 가장 기억나느냐’고 물어보면 ‘성적 좋은 아이들은 자기만 생각하고, 졸업 후 봐도 인사 안 하는 놈들이 많다’고 하더군요. 어지간해선 기억도 잘 안 난다네요. 오히려 농땡이를 치거나 개성있는 학생들이 기억에 남고 거리에서 보면 인사를 잘 한답니다.

 


지금도 가끔 안부 전화를 드리곤 하는 은사님들께 “학창시절 제가 어떤 학생이기에 선생님들이 기억해 주시는지 궁금하다”고 여쭈었더니 “자네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하기 싫어하는 질문을 많이 했던 게 기억난다”고 하시더군요. 성적이 좋은 아이들은 점수 몇 점에 매달려 시험 치고 나면 희비가 엇갈리곤 했는데 “자네는 그런데 별로 신경 안 썼다”며 성적에는 대범했던(?) 당돌한 중학생의 모습이 기특했나 봅니다. 선생님이 질문을 받아주셨기에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하죠.


결석을 하지 않아 3년 개근상을 받았고, 학생회 활동을 한답시고 상을 하나 더 받아 성적과는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냥 평범한 모범생으로 남의 눈에 안 뜨이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기억해 주시는 은사님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특히 역사와 정치경제, 국어 시간에는 눈이 반짝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말을 모르면 아무 것도 못 한다’며 국어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3학년 때 담임을 하신 김형기 선생님 덕분에 우리말본과 국어 공부는 열심히 했습니다.


역사나 사회를 모르면 대화에 못 끼인다.


‘사회생활하면서 역사나 사회 모르면 말하는데 끼지도 못한다’고 하신 선생님, 수업 시간에 떠들면 ‘뒤에 가서 그냥 서 있어라’고 하신 전경일 선생님은 매를 드는 법이 없었습니다. 반 전체가 운동장에 불려나가 1시간 가까이 서 있는 벌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열 대 여섯 짜리 중학생이 뭘 안다고 “신문 사설을 꼭 읽어라”고 하셔 우겨서 신문구독을 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사설은 거의 매일 읽은 덕분인지 내 생각을 적는데 큰 지장이 없습니다.

 

 

오히려 제 글이 ‘너무 논설문 같다’는 면박을 받곤 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전근 온 독어를 가르친 정기화 선생님이 계십니다. 한 살 적은 큰 따님이 미모에 늘씬했는데 일부러 댁에 놀러가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먼저 세상을 떠나신 사모님은 간호사였는데 정이 많은 분이었습니다. 놀러 가면 상다리가 휠 정도로 가득 차려 주셔 저희들은 신나게 먹어 치웠습니다. 세상에 관심이 많은 저에게 ‘사회 관련 공부를 하려면 독어를 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만 흘려듣고 말았습니다.


학교 앞 도로가 포장이 안 되어 있을 정도로 교육 여건이 좋지 않은 신설학교에 적응을 못하고 방황하는 저를 안타까워하며 ‘중학교 때는 안 그렇던데 왜 그러느냐. 넌 잘 할 수 있다’며 수시로 격려해 주신 고마운 분입니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그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졸업도 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수시로 치는 시험에 질려 내가 하고 싶은 세상에 대한 공부는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독어 공부를 제대로 했더라면 지금쯤 신학이나 사회과학 쪽의 공부를 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자가 진보정당운동을 한다고 하니 ‘자네가 그 힘든 걸 하느냐’며 걱정을 해 주시는 어머니같은 이덕순 선생님도 계십니다. 전경일 선생님은 ‘진보정당은 반드시 필요하다’며 사회선생님 답게 격려해 주십니다. 이 정도라도 글을 쓰고 남들 앞에서 말도 하고, 우리의 미래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예민한 시절 좋은 스승을 만난 덕분입니다. 은사님이라 부를 수 있는 어른들이 계셔 행복합니다.

 

덧 글: 사진은 큰 형님 같은 은사님과 대구의 명물 반월당 막걸리 골목에서 추억을 떠 올리며 오붓하게 막걸리 한 잔 하던 장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