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독재에 저항한 뛰어난 활동가였던 서경석
서경석 목사는 경제정의시민실천연합(경실련)은 실질적으로 만든 인물로 알려져 있다. 어쩌면 지금의 시민운동 문을 연 당사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넓은 오지랖에 ‘일 벌이는 것 하나는 끝내 준다’고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다. ‘일을 벌이면 추진하는 것은 따라갈 사람이 없다’는 말을 기독청년운동을 함께 했던 지인들로부터 많이 들었다. 지금은 맛이 가 쳐다보기도 싫지만 왕성한 활동만은 탁월하다. 함께 하지 않고 자기 의도대로 하려는 우격다짐 또한 보통이 넘는다.
▲ 서경석 목사가 2009년 11월 24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 뉴라이트전국연합 4주년 기념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 오마이뉴스)
서경석 목사는 1974년 박정희 유신독재에 저항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민청학련 사건에 기독교청년학생들이 많이 연루되어 있었다. 노무현 정부 때 고위직에 있었던 사람들 상당 수가 이 사건의 주모자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사람 180명은 비상군법회의에서 인혁당계 23명 중 8명이 사형을, 민청학련 주모자급은 무기징역을, 그리고 나머지 피고인들은 최고 징역 20년에서 집행유예까지를 각각 선고받았다.
1975년 2월 15일 대통령특별조치에 의하여 대부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민청학련 사건은 2009년 재심을 통해 무죄로 판결이 났다. 서경석이 이 사건에 연루될 정도로 뛰어난 학생운동의 활동가였다. ‘몸이 튼튼해야 변혁운동을 한다’며 이들은 합숙을 하면서 일과표에 따라 운동도 하는 등 치열하게 청춘을 불살랐다. 20대의 대학생들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던졌으니 정말 헌신적이었다. 사형선고를 받고도 ‘영광입니다’라고 한 대학생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