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야기

“김지하와 유시민은 맹자타령 집어 치우라.”

녹색세상 2009. 10. 3. 20:32

잊을 수 없는 유시민의 언행


최근 맹자의 언설이 글 잘 쓰고, 말 잘하는 분들의 입방아에 올라 몸살을 앓고 있다고 들었다. 우리가 주목하는 ‘말 잘 하는 분’은 다름 아닌 유시민 전 장관이다. 유 전 장관은 지난 29일 ‘노무현 시민학교’의 강사로 나와 ‘노무현 가치,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강연하면서, ‘사리취의’(捨利取義: 의를 얻기 위해 목숨도 버린다)라는 맹자의 말을 인용했다고 한다. ‘노무현 정신’은 개인의 이익추구에 있지 않고 공동체의 선(義)에 있다면서, ‘깨어 있는 시민 정신’을 강조했다고 하는데, 하필이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기리는 자리에서 맹자가 등장하는지,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다.

 


맹자라는 책의 맨 앞장은 맹자와 양혜왕 간의 말다툼으로 시작한다. “노인께서 천리를 머다 않고 오셨으니, 우리나라를 이롭게 하여주시겠지요?”라고 양혜왕이 인사말을 건네자, 버르장머리 없는 맹자는 대뜸 왕에게 일갈한다. “왕은 하필이면 이를 말하십니까? 다만 인과 의가 있을 따름입니다.”고 했으니 대단한 배포의 사나이가 맹자였다. 노무현 참여정부의 실질적 노선은 신자유주의였다. 이를 부정하는 논객은 없으리라 본다. 신자유주의는 맹자의 개념 체계 안에서 볼 때, 의(義)보다 리(利)를 앞세우는 사상이다.


40대의 노무현, 1988년 청문회 정국에서 대재벌 정주영을 호되게 꾸짖던 노무현 씨가 맹자의 의(義)를 추구한 사나이였다고 한다면 이는 옳다. 하지만 청와대에 들어간 60대의 노무현, 한미동맹이라는 현실의 이익에 굴복하여 이라크 참전을 강행하고, 급기야 김선일의 죽음 앞에 냉정한 태도를 취하였던 노무현 대통령의 행동이 과연 ‘사리취의’한 것인지 매우 의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잊지 못한다. 그때, 국회에 찾아간 모 언론사의 기자 앞에서 ‘김선일의 죽음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청와대의 비인도적인 결정을 옹호하고 나섰던 유 전 장관의 언행을 잊을 수 없다.  

 

“대통령은 하필이면 한미동맹이라는 이해관계의 관점에서만 이라크 참전의 필요성을 보십니까? 대한민국 헌법은 모든 침략행위를 거부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맹자의 기개를 닮은, 노무현의 측근 인사가 한 명이라도 있었던가? 역사는 기억하고 있다. 도둑놈의 자백도 명지인가? 우리가 주목하는 ‘글 잘 쓰는 분’은 ‘오적’의 시인 김지하이다. 김지하 시인의 망발은 극에 달해 있으니 노망이라 해고 과언이 아니다. 김지하는 6일 조선일보에 기고한 ‘1천만원 짜리 개망신’이라는 글에서 정운찬의 언행을 칭송하면서 <맹자>의 명지(明志)를 인용하였다.

 


“사람은 저래야 한다. 위기를 뚫고 가는 사람은 저렇게 분명해야 한다. 분명한 것. 맹자(孟子)는 이러한 태도를 두고 명지(明志)라 했다. ‘뜻이 분명하다’는 뜻이다.”며 맘껏 기개를 펼쳤다. 유시민 전 장관의 맹자 타령이 자못 이해되지 않았듯이, 김지하 시인의 맹자 타령 역시 아둔한 나에겐 얼른 이해되지 않았다. 1000만원의 뇌물을 ‘받은 것’이 ‘명지’인가? 1000만원의 뇌물을 받았다고 밝힌 것이 명지인가? 아니면 1천만원 밖에 받지 않은 것이 명지였다는 말인가? 뇌물 100만원 받으면 공무원은 파면 당하는데 1천만원이면 물어 볼 필요조차 없다.


시인의 문맥으로 들어가 보아 판단하건대,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지 않고 범행 사실을 사실대로 밝힌 것이 ‘명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도둑놈들이 검사 앞에서 1000만원짜리 금품을 도둑질했다며 자백하는 것도 다 ‘명지’에 해당하는가? 아무리 생각하여도 정운찬의 뇌물 수수의 사실 고백은 맹자가 말한 군자의 ‘밝은 뜻’은 아닐 성싶다. 시인의 어법을 빌리면 ‘흐린 뜻’(濁志)이라고 하는데 노망이 가깝다는 증상이라 서글프기 그지없다. 아니면 언론에서 알아주지 않는다고 보채는 아이 짓이다.


아전인수 또는 몽상적 칭송


고전의 해석은 자유다. 해석의 자유로움에 의해 고전은 재창조된다고들 한다. 하지만 유시민의 맹자 언급은 자신의 정치적 상전을 미화하기 위한 아전인수(我田引水)이지, 역사의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 또, 김지하의 맹자 언급 역시 한 인간의 정치적 진실을 총괄하는 표현이라기보다, 아끼는 후배를 향한 몽상적 칭송에 가깝다. 지금, 정운찬은 모든 것을 대 내주고라도 권력의 한 자리를 얻고자 분투하는 사람이다. 문제는 그가 이명박과 같은 장사치 출신이 아니라 유명 국립대 총장이라고 하는 학계의 거두였다는 데 있다.


학자는 정치적 실천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한다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정치권력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게 고 박종홍 선생의 유지였다. 학자가 정치적 주요 사안에 방관하며 산다고 욕 얻어먹더라도 상아탑의 고독 속에서 진실을 탐구하는 것이 학자의 자세라고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서 배웠다. 박정희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이 교정에서 청년학생들을 끌고 갈 때마다 오열하였다. 그런 학생들 앞에서 교수들은 ‘가치의 중립’을 역설하였고, ‘진리 탐구’가 지식인의 소명이라는 고귀한 말씀을 강변하였다. 과연 대학생의 나이에 독재정권과 투쟁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 때문에 번민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 이재오 국민권익위원장(왼쪽 둘째 얼굴)이 30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 시작에 앞서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과 포옹하고 있다. 오른쪽은 정운찬 국무총리. (사진: 한겨레신문)


서울대 교수들에게 묻는다


그런 서울대 교수들이 지금 그들의 수장이었던 정운찬 전 총장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지금 정운찬의 탈법과 비리를 따질 여유가 없다. 학자의 기본자세는 ‘사실에 대한 정밀한 탐구정신’이라고 우리는 배워서 안다. 다 버려도 이것만큼은 지켜줘야 한다. 서울대의 교수들에게 묻는다. “과연 용산참사의 원인이 화염병에 있었다.”고 말하는 정운찬의 망발은 사실적으로 정당한가? 사회적 약자의 권익을 배려해야 한다는 ‘가치판단’을 놓고 따지자는 게 아니다. 가치판단을 떠나서 용산참사가 화염병 때문에 발생했다는 정운찬의 발언은 사실에 맞느냐는 물음이다.


학자가 어제 한 발언을 이유 없이 오늘 바꾸는 것도 큰 죄악이지만, 참사의 직접적 계기가 죽임을 당한 분들의 손에 든 화염병에 있었다며 사실을 왜곡하는 사태 앞에서 우리는 절망한다. 이것이 곡학아세(曲學阿世)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온 세상이 장사치의 이익 앞에 굽실거리더라도 국민의 공익을 책임지는 정부만큼은 이익의 논리를 넘어, 공동체의 선을 추구해야 한다. 이것이 맹자가 양혜왕에게 주문한 정신, 의(義)다. 견리사의(見利思義) ‘이익을 보면 의를 생각하라’고 공자는 가르쳤다.


그런데 2009년 대한민국처럼 이익의 논리 이외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맹목의 정부가 들어섰을 때, 수백억대의 금융자산을 굴리는 강남 졸부들의 세금은 ‘평등의 이름’으로 덜어주고, 가진 것이라곤 골병뿐인 농촌의 노인들에겐 그동안 삶의 최소한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쌀 수매 그것마저 ‘효율의 논리’를 앞세워 걷어차 버리는 이 무지막지한 정부가 들어섰을 때, 강바닥을 파헤쳐 모래 팔아먹을 생각만 하고, 물고기들의 생명이 몰살되는 것은 안중에도 없는 야만의 정부가 들어섰을 때, 우리는 지성의 전당인 대학에게 사회적 비판의 역할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정운찬 씨가 내팽개친 것, 한 개인의 입신출세와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한 가치, 수  많은 청년학생들이 감옥에 가면서 지켜온 가치, 그것은 바로 대학의 사회적 책임이었다. 지금은 정부도 눈이 멀고 학자들마저 곡학아세하는 시대다. 뜻있는 지식인의 입엔 재갈을 물리고,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헌신하는 시민단체 활동가들 마저 때려잡는 이때, 절망하는 민중은 누구로부터 희망의 소리를 들을 것인가? 김지하 시인이 진중권의 쓴 소리에서 귀담아 들어야 할 정신은 바로 시인의 소임이다. 진중권의 말처럼 ‘개 보다 못한 사람들은 개가 짖는 소리에 고마워 할 줄’ 알아야 한다. (레디앙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