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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범’을 시애틀에서 잠 못 이루게 해야 하는가?

녹색세상 2009. 9. 9. 12:12

재범을 몰아낸 것은 우리들의 집단 광기


아이돌 그룹 2PM의 리더 재범(박재범)이 급기야 한국을 떠나고 말았다. 2005년 미국 인터넷 사이트 ‘마이스페이스’에 올린 한국 비하 글이 누리꾼들 사이에 알려지고, 이를 언론이 보도하기 시작한 지 불과 4일 만에 그는 고국을 등지게 된 것이다. 파문이 확산되자 그는 사과문을 올리고 출연 중인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가지 않는 등 자숙의 모습을 보였지만 대다수의 팬들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심지어 다음 <아고라>에는 ‘재범을 퇴출하라’는 청원 서명이 마치 활극(活劇)처럼 벌어지기도 했다.

 

▲ 한국 비하발언으로 파문을 일으켰던 인기 아이돌 그룹 2PM의 리더 박재범이 8일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미국 시애틀로 출국했다. (사진;오마이뉴스)


누리꾼들은 ‘재범은 한국에 돈 벌러 온 미국인일 뿐이다’, ‘양키 고 홈’, ‘제2의 유승준이 될 것이다’, ‘결코 그를 용서할 수 없다’는 등의 사나운 글을 분주히 올렸다. 견디지 못한 그는 결국 그룹 탈퇴를 선언하면서 다시 용서를 빌고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8일 가족이 있는 미국 시애틀로 쓸쓸히 돌아간 것이다. 각고의 노력 끝에 이제 한창 인기가 치솟고 있는 그룹을 탈퇴하는 것은 연예인으로서 사형선고나 진배없는 일이다. 대관절 그가 무슨 험한 말을 했기에 한국인들은 그리도 분개했는지....


그가 영어로 올린 글에서 문제가 된 대목은, ‘한국은 넌덜머리가 난다(gay)’, ‘한국인은 이상하다’, ‘내가 하는 저질 랩을 잘 한다고 칭찬한다’, ‘정말 둔감하다’ 등이었다. 철부지 시절에 누구인들 그 정도 말 하지 않았는지 자문해 보자. 많은 한국인들은 유명인이라면 곧 공인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연예인들은 입만 열면 ‘공인으로서…’라는 말을 꼭 한다.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개인이 왜 공인이란 말을 해야 하는지 나이 쉰 줄에 접어든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다시 한 번 명토박아 두거니와 연예인과 프로운동 선수는 공인이 아닌 개인이다.


사실 이번에 일이 벌어지고 나서 처음 그를 알았다. 그래서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들에게 유달리 높은 도덕성을 요구한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음주운전으로 나가떨어지는 연예인도 있고 술집 소란으로 선수 생명이 끊어지기도 한다. 그들에게는 도덕성뿐 아니라 뜨거운 애국심까지 있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이런 요구에 잘 부응하는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는 인기를 누린다. 이런 점에서 박지성은 단연 기민한 선수이다. 그래서 유럽에서 벌어지는 유럽인들의 스포츠 잔치에 그가 몇 분 출전하고 안 하고의 사실까지가 다 뉴스거리가 되는 나라가 한국이다.


황당해하거나 기분 나쁜 일로 끝냈어야


‘재범’의 발언을 옹호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의 발언은 적잖이 황당한 것이었다. 또한 한국인을 근거 없이 비하하는 말을 듣고 기분 좋을 사람은 없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황당해하거나 잠시 기분 나쁜 걸로 끝냈어야 했다. “별 바보 같은 놈도 다 있네”라든지, 아니면 좀 더 심하게 그의 부모를 탓하며 가정교육을 문제 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에서 더 나아가지는 말았어야 할 일이었다. 문제의 글은 연습생 시절이던 4년 전에 친구와 대화 형식으로 올린 것이었다. 또한 그가 교포 2세라는 특수한 정황도 마땅히 참작했어야 한다.


고등학생으로 한국에 와서 외롭게 지내며 고국의 낯선 풍토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18세 소년의 넋두리 정도로 봐준다면 얼마든지 봐 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는 처음 한국 사회가 매우 거칠고 배타적이라고 느꼈을 수도 있다. 영어 잘 하는 것을 부러워하면서도 교포 2세들이 우리말을 정확히 하지 못한다고 비난을 퍼붓는 이중성을 우리 사회는 갖고 있다. 필요에 따라 늦게라도 배우면 되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영어에 우리말은 겨우 토씨만 사용하는 교포들은 너그러이 봐 준다.


“가족들도 다 미국에 있었고 한국 와서 주위 사람들은 다 저한테 냉정하게 대하는 것 같았습니다. 언제 데뷔할지도 모르고 너무 막막한 상황이었습니다. 정말 여러 가지 상황들 때문에 너무 힘들고 외로워서 집이 많이 그리웠고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들어서 가족이 있는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제가 한국에 대해 표현했던 건 제가 당시 제 개인적인 상황이 싫어서 감정적으로 표현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너무 어려서 정말 잘못 표현했습니다. 그때는 철도 없었고 어리고 너무 힘들어서 모든 잘못을 주위상황으로 돌리는 실수를 했습니다. 그 글들은 4년 전이었고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앞으로 이런 실수가 다시는 없도록 하겠습니다.” (재범의 사과문 중에서)


이렇게 절절한 사과를 한 22세 청년에게 용서 대신 무려 1만 개나 되는 댓글을 붙이고 별의별 저주를 퍼붓고, 신문지상에 보도함으로써 파문을 확대 재생산하여 결국 가수의 생명을 끊는 것은 도대체 무슨 심보란 말인가? 이런 것을 애국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백번 양보하여 애국심이라고 해도 애국심 또한 인간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집단 광기’가 아니고서는 달리 설명할 수 없다. 어깨가 축 처진 채 풀 죽은 표정으로 인천공항 출국장으로 들어서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아프고 낯이 뜨거워 더 이상 할 말을 잃는다. (오마이뉴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