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일제 충성심으로 무장하다.
우리말이 더러워 질 것 같아 다까끼 마사오(박정희)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중씨인 박상희 선생이 구미 일원에서 치열하게 항일운동을 한 사실을 우린 안다. 그렇지만 막내였던 그는 형님과는 정반대로 일제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인물이었다.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를 하다 그만 두고 만주군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1940년 4월 4일)한 그때 다까끼 마사오 나이 23세였다. 입교 동기생 240중 조선인 12명이었다. 만주군관학교입학 성적 15등이었으나 투철한 친일정신과 열성을 다한 훈련으로 수석 졸업의 영광을 차지했다.
▲ ‘5ㆍ16 쿠데타’ 당시 박정희 소장. 좌측에 권총을 하고 있는 사람이 ‘피스톨 박’이라 부를 정도로 권총의 명사수이자 경호실장을 지낸 박종규(소령), 맨 우측이 육군대위 차지철.(사진:오마이뉴스)
수석졸업의 영광으로 금시계를 선물로 받고 졸업생 대표로 천황찬양으로 가득한 답사를 읽었다. 당시 친일신문〈만선일보 1942. 3. 24〉기사 일부를 인용하면 “빛나는 우등생 오카이(日系), 고야마(日系), 다카기(鮮系-박정희) 등 5명에게 각각 은사상증의 전달이 잇고 폐식하였다.”고 되어 있다. 만주군관학교 출신의 조선인은 대략 제1기∼제7기까지 50여명 정도인데 만군 출신들은 훗날 대통령, 국회의장, 국무총리, 국방장관, 군참모총장, 해병대사령관, 군사령관, 군단장, 연대장, 고급 참모 등 정부와 군의 요직을 차지했다.
다카기 마사오(박정희)를 지도했던 한 일본인 장교의 말을 들어보면 다카기 마사오가 얼마나 몸과 마음을 바쳐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하고자 하였나를 알 수 있다. 매년 가을이 되면 군관학교에는 생도 전원이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행군연습을 실시했다. “다까끼 마사오는 그때 내가 맡은 소대의 제1분대장이었는데, 다른 분대장과는 달리 기합이 들어 있었고, 의욕도 대단했다. 진지공격 연습 같은 때 대단히 어려운 임무가 부여 되더라도 박정희는 그 임무를 달성하려는 의욕으로 꽉 차있었다. 박정희는 말수가 적고 속에 투지를 감춘 사나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할 정도다.
뼈 속까지 스며든 완전한 일본인이 되다.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관례대로 우등생에게 주어지는 일본육사 편입이라는 특전을 누리게 된다. 다카기 마사오는 일본 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려고 군관학교 시절 남들보다 철저한 황군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닦고 열심히 공부했다. 일본 육사에서도 진지한 학습태도로 모범생이란 평을 받고 3등이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한다. 조선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육군 대신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이로써 박정희는 완전한 일본인(다카기 마사오)이 되었다. 아니 대일본제국의 군인이 되었다. 훗날 다카기 마사오가 10.26으로 죽었을 때 주한 일본대사관에서 한 일본외교관은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고 할 정도였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소위 다카기 마사오는 일본 본토의 마쓰야마 제 14연대에 처음 배속을 받았으나 진정한 일본 군인을 참작하여 만주 제8연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모란강 부근의 영안으로 전출되었다가 화북지방의 열하 보병 제8군단에 배속된다. 영안지방→간도에서 활약한 한인 독립군부대가 북만주로 이동할 때와 노령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서쪽으로 진출할 때에 주둔하던 요충지였다. 열하지구⇒ 일본군에 대한 항일 투쟁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다. 항일세력은 팔로군, 군부군, 광복군, 조선의용군, 소규모의 게릴라(유격대) 등이었다.
다카기 마사오는 이곳에 임관한지 1년 만에 중위로 진급한다. 군의 편제상 소대장은 최전선에 배치된다. 여기에서 다카기 마사오(박정희)는 열성적으로 항일부대를 토벌했던 공로로 승진이 빨랐던 것이다. 일본은 만주 서남부와 중국북부에 투입할 용맹한 부대를 선발하여 특수부대(철석부대)를 만든다. 여기에 조선인 부대인 간도특설대도 선발되는 영광(?)을 얻는데 그 속에 다카기 마사오(박정희), 이주일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다카기 마사오(박정희)는 중국북지(열하성 만리장성 남방 평곡-북경 동북방)로 투입되어 항일 세력과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여기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소수민족들의 특수부대는 많았다. 조선인의 간도특설대, 러시아인의 찬야부대, 몽고인의 기야부대, 회교인의 회교부대, 오르치온족의 공작대 등이 있었는데.... 간도특설대가 가장 강력했다고 한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일본군, 만주군이 못하는 작전을 간도특설대가 가서는 거뜬히 해치우곤 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조선인 공적평가에 인색한 일본인들도 간도특설대에 대해서는 ‘상승의 조선인부대’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다까끼 마사오(박정희)가 소속한 특수부대(간도특설대) 요원들이 얼마만큼 항일군의 토벌에 커다란 공을 세웠는지를 대변해주는 이야기이다.
변신의 달인 다카기 마사오
보통학교 교사에서 만주군관학교의 수석졸업과 금시계의 영광과 3등으로 졸업한 일본육사 생활도, 만주에서 관동군으로 복무하며 항일세력을 토벌하던 것 마저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날아가 버린다. 친일파 아니 일본인 다카기 마사오(박정희)는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는 어떤 행동을 하였을까? 패잔병의 낭패감을 맛보며 절망에 빠진 것도 잠시였다. 일본군이 패망하자 임시정부는 징병으로 끌려 온 청년들을 광복군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현지를 갔다. “그때까지도 다까까 마사오는 일본군 모자를 쓰고 있었다.”며 광복군 장교였던 장준하는 목격담을 말했다. 잠시 광복군 모자를 쓴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유리한 상황에만 빌붙는 기생충 같은 기회주의자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이것뿐만 아니다. 후일 다카기 마사오(박정희)는 좌익계열의 장교가 되지만 여순 사건으로 불리해지자 천명이 넘는 동료들을 밀고하고 자기만 살아남는다. 또한 이후에 다시 우익장교로 철저히 변신한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반공주의자로 변신하여 기회주의자란 무엇인가를 완벽하게 보여 준 인물이었다. 속성이 이런 인간이니 일본 패망 후 곧 잠시라도 광복군 모자를 쓴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을 적극적으로 토벌하던 일본의 진짜군인 다카기 마사오(박정희)의 화려한 변신은 시작되었다.
만주군관학교⇒일본육사⇒관동군으로 이어진 다카기 마사오(박정희)의 복무기간은 5년 정도이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다카기 마사오(박정희)는 몸과 마음을 환골탈퇴하여 일본인 일본군인이 되어 정서체계와 사고방식 등 모두 일본 놈 그 자체였다. 그 증거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나타난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뒤에도 틈만 나면 주일 대사관을 통하여 입수한 일본 사무라이 영화를 관람하고 일본 검도를 즐기는 것이 다카기 마사오(박정희)의 취미 생활이었다. 또한 당시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 등과 청와대에서 술을 마시며 일본천황의 교육칙어를 번갈아 외우는 내기나 시합을 하곤 했다. 다카기 마사오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지독한 향수를 엿 볼 수 있다.
다음 글을 읽어 보자 압권이다. (중앙일보. 1991. 12. 14일자) “계엄선포 한 달 전쯤인가(1971. 10. 17 계엄이 선포되었다) 박 대통령이 나를 불러요.(강창성 전 보안사령관)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대통령은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장화에 점퍼차림인데 말채찍을 들고 있었어요. 박대 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만주군 장교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다카기 마사오 중위로 정일권 대위 등과 함께 일본군으로서 말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박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할 때면 그분은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
이런 미친 인간이 18년간 우리의 대통령이란 이름으로 나라 망신 다 시켰다. 그는 통치 기간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을 인재로 등용하여 나라를 좀먹고 민족정기를 회복할 수 없도록 망쳐 놓았다. 일본 방문 중 동경의 한 요정에서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명치유신 당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들의, 나라를 위한 정열만큼은 잘 알고 있다. 그들 지사와 같은 기분으로 해볼 생각이다.”고 말해 동석했던 일본인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것도 유창한 일본어로 말이다.
1963년 12월 17일 다카기 마사오(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일본의 자민당 부총재 오노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은 걸작의 말을 한다. “박정희 대통령과는 부자 사이 같은 관계로서 아들의 경축일을 보러 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즐겁다.”고 하였다. 사실 자민당의 보수 세력은 박정희와 군대생활을 같이 했던 일본제국의 동료 및 상관들이었다. 일본군국주의 세력의 정신적 유대는 대일 굴욕회담을 밀어 붙인다. 여기서 식민지 지배 피해에 대한 거의 모든 권리와 주장을 포기한다. 또한 1973년 서울 지하철 차량부정도입 사건을 저지른다.
일본에서 지하철차량 186량에 대한 매매계약을 체결하였는데 일본에서 3,204만엔하는 가격을 6,350만엔이란 두 배 정도나 비싼 가격으로 계약하였다. 이것은 만주군 출신 선배들의 로비와 정치자금의 리베이트가 작용했다. 어떤가? 이러한 자의 기념관을 세워줘야 한단 말인가? 집권시절 독재와 반민주, 반인권 등의 죄악을 묻지 않아도 친일 행위 하나만으로 기념관은 불가한 정도가 아니라 부관참시를 시키고도 모자랄 인물이다. 스페인은 독재자 프랑코의 무덤에 ‘다시는 일어나지 마라’는 교훈으로 10톤의 무거운 돌로 눌러 놓았다. 일본은 패망했지만 친일파는 망하지 않고 지금도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한토마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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