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일공장 제논(Zanon)의 회사 이름은 ‘사장 없는 공장’
아르헨티나 내륙지방 ‘네우껜’에 있는 한 타일회사, ‘제논’은 이제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 노동자 회생기업으로 전 세계적인 관심과 주목을 받고 있다. 2001년 사장이 회사를 포기하고 공장폐쇄를 하자, 제논의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고용과 생산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공장을 점거하였으며, 이윽고 2002년 2월부터 도망친 사장을 대신하여 공장을 직접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제논 노동자들의 공장 점거와 자주관리는 뭔가 대단한 이념으로 움직인 결과라기보다는 스스로의 삶을 지키기 위한 자위적 행위였다.
다만 이 자위적 행위가 자본주의적 소유권에 직접적으로 반기를 들면서 스스로 공장을 가동하여, 고용과 생존권을 지키려고 했다는 점에서 다른 투쟁의 경우와 다를 뿐이었다. 이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2002년 페소-달러 일대일 태환체제가 폐지되면서, 아르헨티나의 경제상황이 다소 호전되자 예전의 사장이 다시 돌아와 회사의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이에 동조하는 법원과 경찰은 강제퇴거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제논의 노동자들은 거기에 맞서 물러서지 않고 싸웠다. 주간에는 공장을 돌려 일을 하고, 야간에는 불침번을 서고 자위수단인 새총을 사용하여 격렬하게 경찰의 진압에 맞섰다.
이러한 과정이 계속되는 4년 동안 공장가동과 제품 판매는 꾸준히 확대되어, 10%대의 공장가동률은 30%대로 확대되었다. 380명 노동자 중 공장폐쇄 시 남아있던 240명 노동자는 이제 480명까지 늘었다. 어려운 조건에서 자주관리에 들어갔지만, 생산을 확대하고 이와 동시에 고용까지 확대하는 큰 성과를 내었던 것이다.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공장의 법적 상태를 타계하기 위하여, 2005년 협동조합으로 전환을 하였다. 그리고 이 협동조합의 이름을 ‘Fabrica sin Patrones’으로 만들었다. 이 말은 ‘사장 없는 공장’이라는 뜻이다. 여전히 제논 노동자들의 최종 목표는 노동자통제 하에 회사를 국유화하는 것이다.
점거하라! 저항하라! 생산하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의류공장인 ‘브룩만’은 역시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으로 유명한 곳이다. 브룩만 의류공장의 경우 노동자에 대한 해고가 1995년부터 시작되었다. 사장은 장기적으로 회사를 정리하고자 하였다. 2001년이 되자 주 100페소이던 임금은 2페소까지 떨어졌다. 그러다 브룩만은 2000~01년 경제위기 때 공장점거의 대명사가 되었고, 이윽고 자주관리 기업으로 전환하였다. 브룩만의 사장은 회사 설비를 담보로 정부와 금융권으로부터 융자를 받아 이를 금융투자에 전용하였다. 이러한 행태는 아르헨티나 자본가들에게 보편적인 것이었다.
지속적인 경기침체, 소위 스톱-고 순환이라고 불리는 불안정한 경제상황 때문에, 산업자본가들 상당수는 생산보다는 금융투기와 각종 부정부패를 통해 부를 축적하는 퇴행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사이 노동자 민중은 빈곤선상에서 허덕이고 평균임금은 절반 이하로 축소되었다. 여러 차례의 강제 침탈과 사수가 있은 후, 2003년 10월 시 당국은 브룩만 노동자들의 공장 수용을 임시적으로 허가하였으며, 12월까지 노동자들이 공장에 다시 복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제논과 브룩만의 경우처럼, 아르헨티나의 노동자들은 1999년과 2002년 사이의 최악의 경제 위기를 임금, 고용에 대한 수세적인 방어투쟁이 아니라 공세적인 공장점거, 자주관리 투쟁으로 대응해 갔다. 이 투쟁은 노동자 자신의 고용과 생존권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과, 자신들이 파산하고 폐쇄된 공장에서 생산을 책임지는 노동자라는 자존감에서 나온 투쟁이었다. 아르헨티나 공장점거, 노동자 자주관리 운동의 슬로건은 “점거하라! 저항하라! 생산하라!”였다.
확대되는 노동자 자주관리 운동
아르헨티나에서는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을 ‘노동자 회생기업’이라고 부른다. 사장이나 대주주들이 공장 문 닫고 도망친 회사와 공장을 노동자들이 점거하고 이를 자체적으로 운영하여 살렸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이 못한 일을 노동자들이 해냈으니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공장 가동을 확대하고 고용까지 창출하고 있으니, 노동자들의 창의가 얼마나 대단한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연구자마다 차이가 있지만, 이러한 자주관리 기업은 아르헨티나에만 대략 100여개 정도이고 고용인원은 10,000명에서 15,000명에 이른다. 이러한 자주관리 운동을 촉진하고 서로 소통하기 위하여 MNER와 MNFRT 등의 단체가 있으며, 회생기업 간 전국적인 대회나 집회도 개최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노동자 자주관리는, 회사의 파산과 공장폐쇄 등에 직면한 상태에서 노동자들이 공장을 떠나 길거리에 나 앉지 않고 스스로가 공장을 점거하여 생산을 유지하는 것을 통해 고용과 생존권을 지키자는 절박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공장점거와 공장에 대한 자주관리가 진행되면서 노동자들의 의식과 문화가 발전하고 고양되는 모습을 낳았다. 이는 공장운영에서 확인된다. 제논이나 브룩만 모두 모든 결정은 노동자 전원이 참여하는 주기적인 총회(대개 주 1회)에서 이루어지며, 공장 운영을 위한 대표자들은 모두 노동자들이 선출하고 언제든지 소환될 수 있다.
이들 대표자는 자기 자리를 오래 유지할 수 없으며, 공장의 모든 직책은 노동자들이 돌아가며 맡는다. 노동자 모두는 동일한 임금을 받는다. 이러한 운영방식이야말로 노동자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노동자들의 절박한 당면 문제에서 시작되었지만, 노동자들의 공장경영은 자본주의 하에서 발전하고 심화된 노동의 소외 역시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생산, 구매, 판매, 회계 등 공장 운영의 모든 영역에서 노동자들의 통제권, 결정권이 확보되면서 노동자들의 성과는 노동자들의 것이 되었고 노동자들이 실제로 생산의 주체로서 설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의 적극성과 창의성은 더욱 확대되었다.
지역사회와의 굳건한 연계
게다가 제논이나 브룩만의 노동자들은 개별 공장의 투쟁으로 스스로를 가두지 않았다. 이들은 지역사회와 긴밀하게 연계하여 투쟁을 진행하였고, 지역사회에 적극적인 연대활동을 전개하였다. 제논은 자신의 생산물인 타일 등을 지역의 병원과 학교 건립에 지원하였다. 그리고 자체적인 보건소나 학교를 설립하여 지역주민들에게 의료, 교육 혜택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지역민들과 함께 하는 콘서트 등 문화행사를 통해 유대감을 높였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는 지역사회의 굳건한 지지로 이어졌으며, 경찰의 수차례 강제퇴거시도를 막아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아르헨티나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에서,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장기적으로 장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의 사례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노동자들의 역동성과 창조력이다. 아르헨티나의 자주관리는 어떤 이념과 사상에 의해 인도된 것이 아니라, 노동자 스스로가 처해있는 상황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파리코뮌, 소비에트에 대해 자세히 연구하지 않았을 노동자들이 코뮌에서 보여주었던 노동자민주주의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은 노동자들의 능력과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리고 수세적인 저항이 아니라 자본에 대한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대응이 오히려 더 많은 가능성을 낳는다는 것을 확인해볼 수 있다. “이 일은 단지 더하고 빼고 하는 문제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The Take’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아르헨티나에 있는 의류공장 ‘브룩만’에서 일하는 한 노동자의 이야기이다. 이들에게 공장의 경영은 대단한 기술이 필요한 것도, 소수의 많이 배우고 박식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브룩만의 노동자들에게 공장을 운영하는 것은 단지 기본적인 지식과 상식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다.
브룩만의 노동자 중 한명은 자주관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이미 공장의 비용이 얼마인지, 원재료의 비용이 얼마인지 압니다. 아마 이것이 사장이 우리를 밖으로 내몬 이유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공장을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우리는 알고 있으며, 노동자들이 어떻게 공장을 운영하는지를 안다면 나라도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본가들과 기득권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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