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니묄러’는 “나치는 맨 처음 공산당원들을 잡아들였다. 그러나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침묵했다. 다음에 그들은 유태인들을 잡아 들였다. 그러나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다음 그들은 노동조합을 탄압했다. 그러나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했다. 그 다음 그들은 가톨릭신자들에게 들이닥쳤다. 그러나 나는 개신교도였기 때문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은 나에게 들이닥쳤다. 그때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며 통탄을 했습니다.
서울 용산과 평택 쌍용자동차에서 권력과 자본이 ‘함께 살자’는 민중들을 몰아내고, 언론은 처절하기 그지없는 그 현장을 구경거리로 만들 때, 내가 철거민이 아니고 파업 노동자가 아니라고 침묵하고 아무 소리도 하지 않을 때, 그들은 나에게 들이닥쳐 굴복을 강요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지 되돌아봅시다. 내 주위의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외면한다면, 내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은 지극히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연대의 손길이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믿습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고립된 상태에서 80여일 가까이 외로운 싸움을 했습니다. 금속노조의 연대가 있었지만 조직적이고 지속적이지 못했고, 같은 자동차회사인 현대와 기아자동차ㆍ지엠대우 노동자들은 연대 파업은 커녕 휴가를 갔습니다. 처음부터 공장을 세우고 연대 파업을 했더라면 지금과 같이 처참하게 패배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건 우리 아이도 알고 있습니다. 자동차 사업장 가운데 가장 작고 투쟁의 경험이 거의 없는 쌍용자동차 옥쇄 파업 현장을 고사시키며 항복을 받아낸 것은, 향후 자동차산업 구조조정의 칼날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권력과 자본의 본보기’였습니다.
나는 사업을 해 먹고 살만 하고, 교사요 공무원이라 정년이 보장되었으니 침묵한다면 우리가 어려움에 처할 때 도움의 손길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시키는 대로 노예로 산다면 모르겠으나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고 살려면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약자와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는 게 하느님 사랑”이라고 예수는 설파했습니다. ‘이웃 사랑이 하느님 사랑’이라고 명토박았습니다. ‘내 손가락 밑의 가시가 가장 아픈 법’이지만 그래도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길이 멀고 험하면 “아픈 다리 서로 기대고 서로 일으켜 주며,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갈지라도 함께 가야”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가족들이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지 7개월이 가깝도록 장례도 치르지 못하는 용산 유족들과, 처참하게 밀려서 나올 수 밖에 없었던 평택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패배로 인한 상처로 혹여 건강을 해치지는 않을지 걱정입니다. 특히 옥쇄 파업 투쟁을 이끌고, 피를 말리는 협상을 하면서 온갖 고생을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들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나오자마자 구속된 노동조합 집행부에게 연대의 말씀을 전합니다. 치열하게 연대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염치없이 건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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