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예술

예수의 하느님 나라 확장과 저항운동

녹색세상 2009. 7. 12. 22:53

예수 복음의 원형은 민중해방운동이었다. 


초월자와 바른 관계를 맺으면 세상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보기에 돌 하나, 풀 한포기에 이르기까지 신의 사랑과 섭리의 손길이 담긴 것으로 보고 귀하게 여깁니다. 그런 인식은 자연과 세상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또한 자신과 이웃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순풍으로 작용하여 삶의 모든 영역으로 그 풍요로움이 흘러넘치게 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영성은 초월자와 실존자의 수직관계로 끝나지 않고 수평으로도 이어져 존재하는 모든 것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물이 낮은 곳을 향해 흐르며 주변의 땅을 비옥하게 만들고 생명을 움트게 하듯이, 초월자와 맺어진 영성은 삶의 모든 영역으로 뻗어나가 세상을 아름답게 하며 생명을 움트게 합니다.

 

 

그러나 영성이 수평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개인의 차원에 머물면 구조에 의한 횡포를 방관하거나 조장할 수도 있습니다. 자연과 환경이 파괴되고 사회가 고통을 받으며 생명이 소홀히 여겨지는 현실에 눈과 귀를 막고, 자기 조직의 확대에만 주된 관심을 보이는 일부 종교인들의 모습은 이런 엇나간 영성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초월자와 맺어진 관계가 심오할수록 실존자는 현실세계의 부조리를 견디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영성은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이 세계를 초월자와 분리된 별개의 것이 아니라 초월자에 의해 창조된 품이며 거룩한 몸으로 인식합니다. 진정한 영성은 일그러진 실존세계에 대해 아파하며 본래의 아름다움이 회복되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영성이 초월성에 머물지 않고 현실세계의 왜곡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예수는 이런 저항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종교 조직 안에 가두고 독점하려는 종교인들의 독선에 저항하고, 억압과 착취를 일삼는 왜곡된 구조에 저항하여 가난하고 억눌린 민중을 해방하려는 저항 운동이 예수 복음의 원형이었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저항운동의 뿌리는 예수 이전에 이미 기원전 8~9세기경부터 히브리성서(구약성서)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모스와 호세아를 필두로 이사야와 예레미야, 에제키엘(에스겔) 등으로 이어지는 선지자들의 예언은 기득권자에 저항하여 고통 받는 민중을 해방시키려는 운동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언자 아모스는 당시 종교 권력자들과 그에 야합한 무리를 향해 이렇게 질타하였습니다. “너희의 순례절이 싫어 나는 얼굴을 돌린다. 축제 때마다 바치는 분향제 냄새가 역겹구나. 너희가 바치는 번제물과 곡식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친교제물로 바치는 살진 제물은 보기도 싫다. 거들떠보기도 싫다. 그 시끄러운 노랫소리를 집어치워라. 거문고 가락도 귀찮다.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을 개울같이 넘쳐흐르게 하여라.” (아모스 5:21~24)


아모스의 예언은 수평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종교행위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오히려 사악한 위선에 지나지 않음을 여실히 폭로합니다. 실제 생활에서는 정의가 사라진지 오래되었고 억압과 착취를 버젓이 행하는 사람들이 신께 드리는 제사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예언자는 묻고 있습니다. 아모스의 사자후는 마치 성전에서 온갖 기물과 제물에 대한 상업적 독점권을 갖고 호사를 부리던 예루살렘 성전의 종교지도자들, 아니 종교 장사꾼을 질타하고 그들의 상을 뒤엎으신 예수의 분노를 연상케 합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모든 폭력과 억압의 가능성이 완벽하게 사라진 절대정의와 절대평화의 세계를 꿈꾸었습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숫염소와 함께 뒹굴며, 새끼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으리니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친구가 되어 그 새끼들이 함께 뒹굴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리라. 젖먹이가 살무사의 굴에서 장난하고 젖 뗀 어린 아기가 독사의 굴에 겁 없이 손을 넣으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를 가나 서로 해치거나 죽이는 일이 다시는 없으리라. 바다에 물이 넘실거리듯 땅에는 야훼를 아는 지식이 차고 넘치리라.” (이사야 11:6~9)


예언자운동은 1세기 갈릴래아 예수운동으로 그 절정을 이룹니다. 복음서 기자는 예수가 이사야의 하느님 나라 운동을 성취하기 위해 오셨음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난 나자렛에 가셔서 안식일이 되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서를 읽으시려고 일어서서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를 받아 들고 이러한 말씀이 적혀 있는 대목을 펴서 읽으셨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들던 사람에게 되돌려주고 자리에 앉으시자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의 눈이 모두 예수에게 쏠렸다. 예수께서는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하고 말씀하셨다.” (루가의 복음서 4:16~21)


루가는 예수를 히브리 저항운동의 맥을 잇고 완성하기 위해 오신 분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에는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하늘 위로 도망가려는 보수 교리기독교의 현실도피 신앙의 근거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는 왜곡된 현실세계에서 정의와 평화, 행복이 숨 쉬는 아름다운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저항운동의 중심에 서있습니다. 이처럼 올바른 그리스도교 영성은 필연코 왜곡된 모든 것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한국의 주류 교회, 특히 대형교회는 신구교 할 것 없이 예수를 배반한 사람들입니다.


고난 받는 민중들의 삶의 자리로 찾아가지는 못할지언정, 조찬기도회를 만들어 기득권자의 안위와 번영을 빌어주는 종교지도자들은 갈릴래아 예수와는 아무 상관도 없을뿐더러 상반된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행태를 보면 예수께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분노를 표출한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성직자’라는 이름으로 신을 모독하고 백성들을 속일 뿐 아니라 기득권자 편에 붙어 제 잇속을 챙기는 ‘거룩한 사기꾼’들에 의해 하느님과 예수는 지난 이천년 동안 끊임없이 능멸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진정한 예수정신과 예수운동을 이어가는 선각자는 남아 있습니다. 서구 자본주의 신학의 한계를 절감하고 민중의 모습으로 고난의 현장에 가계신 그리스도를 새롭게 발견하여 민중신학으로 정립할 뿐 아니라 몸소 살아간 안병무, 이 땅의 갈라진 현실을 참지 못하여 온갖 불이익을 감수하고 북으로 달려간 문익환 등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예수 따르미’들이 진정한 예수를 고백하는 사람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몸소 자신의 삶 전체로 보여주었습니다. 서울 용산 철거 현장에서 사제들이 경찰의 폭력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하는 추기경이 아닌 시대의 아픔에 함께 하는 그들을 통해 하느님은 역사하십니다. (유상태 글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