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민중

1998년 현대자동차와 2009년 쌍용자동차

녹색세상 2009. 6. 29. 13:23

 

 

한바탕 전쟁을 치른 쌍용자동차 평택 공장은 회사 측이 동원한 구사대와 용역깡패는 일단 철수 했지만 아수라장이 되어 있다. 기상청이 예보한 대로 그 곳에도 추적추적 비는 내리고 있을 것이다. 가동을 멈춘 공장의 지붕과 용역들이 남기고 간 쇠파이프, 그리고 지금도 공장 출입구를 지키고 있는 쌍용차 노동자들 모두 차별 없이 이 비에 젖고 있다. 11년 전 일이니 세월 참 빠르다. 1998년 8월초로 기억한다. 그때 울산 현대자동차는 대한민국 최초 정리해고 단행 여부로 뉴스의 중심에 서 있었다. 노동조합은 그 넓은 공장을 점거한 채 파업을 벌였고, 사측과 정부 역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여러 가지 압박 전술을 구사했다.

 


강성 노조가 존재하는 현대차에서 정리해고가 받아들여지면, 다른 사업장에서 노동자를 해고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총자본은 현대차에 집중했고, 총 노동 역시 그곳에 힘을 모았다. 물러설 수 없는 총자본과 총 노동의 한 판 대결이야 말로 뉴스 중의 뉴스다. 당시 한 번의 제적을 거친 24살 대학 3학년이 있었다. 통일운동을 주로 하는 한총련 계열(NL)이 아닌 노동자계급 중심성을 주장하는 현장파(PD)에 몸담고 있는 학생이었다. 그는 아주 당연하게 다른 학교 동료 한 명과 함께 울산 현대자동차로 향했다. 그리고 노동자로 위장해 공장에 들어갔고, 쇠파이프 들고 정문을 지키는 사수대로 활동했다.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건 그의 투철한 계급성이나 운동성 때문이 아니었다.

 

 

유감스럽게도 24살이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유난히 늙어 보이는 얼굴과, 대학생보다는 공장에서 자동차를 좀 찍어냈을 것 같이 굳세고 투박하게 생긴 외모 탓이었다. 실제로 현대차 공장 안에서 그의 신분을 의심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얼굴이 실제 나이를 뛰어넘고 무서울 것 없이 생겼다고 해서 마음 역시 그러한 건 아니었다. 그건 천사처럼 생긴 사람의 마음 씀씀이가 꼭 천사가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얼굴이 42살처럼 보였어도 마음은 아무리 피 끓는 청춘이라지만 24살 나이게 처음 겪는 일이라 어수룩했을 것이고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많이 무서웠다.


모두들 총자본과 총 노동의 대결이기 때문에 공권력의 진압이 무자비할 것이라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은 쿵쿵거렸고, 손에 쥐고 있던 쇠파이프의 금속성은 얼음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한 열흘 쯤 현대차 공장에 머물렀는데, 그때 비가 참 많이 그리고 자주 내렸다. 게다가 한 번 내렸다하면 보통 비가 아니라, 장대비였다. 그런 비가 내리는 밤이면 공장 지붕을 때리는 소리 때문에 쉽게 잠들지 못했고 날이 새도록 뒤척여야만 했다. 저 멀리 지리산 계곡에서 급류에 휩쓸려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도 들려왔으니 그해 여름의 비는 정말 엄청났다. 그런 여름에 전쟁의 한 복판에 자신의 몸이 있는데 불안하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물론 공장 안 모든 일상이 공포와 두려움으로 점철된 건 아니었다. 함께 위장해 들어간 동료와 장기를 두기도 했고, 노동자들과 족구 경기를 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가 현대차 공장에 머물고 있는 동안 공권력 투입은 없었다. 그리고 얼마 뒤 현대차는 사측과 정리해고에 합의했고, 해고 대상자는 모두 식당 아줌마들이었다. 아줌마들은 “파업 기간 내내 힘내라고 밥 해 먹였더니 이럴 수 있느냐”고 거칠게 항의했고 남성 노동자들의 입은 굳게 닫혔다. 그렇게 가장 낮은 땅에서도, 살인 같은 해고에서도, 남녀 차별은 존재했고 그 상처는 매우 컸다. 그 후 식당아줌마들의 지난한 복직 투쟁은 눈물 흘리지 않고는 볼 수 없는 다큐멘터리 영화 ‘밥꽃양’으로 태어났다.

 

 

어쨌든 우리 모두가 목도했듯이 총 노동은 패했다. 현대차 노동자들은 식당아줌마들을 잘라냄으로써 일시적인 비바람은 피했지만 그 때 뿐이었다. 역시 많은 사람들이 지켜봤듯이 곧 대량 해고는 현실화 됐고, 그 빈자리는 값싼 비정규직이 채웠다. 그리고 이제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자본과 노동의 대결만큼이나 갈등의 골은 아주 예민하게 깊어만 가고 있다. 이렇게 한 번 열어준 해고의 문은 닫히지 않았으며, 그 무자비함은 우리 모두의 상상력을 뛰어 넘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해고의 문으로 잘려진 노동자의 목은 무심하게 실려 나간다.


11년 동안 세상은 참 많이도 변했다. 현대차 파업을 중재하기 위해 공장을 찾았던 노무현은 5년 뒤 대통령이 됐고, 그는 지금 자살로 우리 곁을 떠나갔다. 인터넷 광풍이 불었고 정보통신 거품이 한 차례 꺼졌으며, 그 때는 듣도 보도 못했지만 이제는 ‘네이버나 다음’ 없이는 생활이 잘 안 되는 세상이 됐다. 그리고 그는 머리가 빠져 이마가 좀 넓어졌고 뱃살은 인격과 상관없이 제 마음대로 불었다. 지리산보다 곰배령을 더 자주 찾게 됐고, 학교를 졸업해 건설현장과 공장노동자를 거쳐 기자가 됐다. 그래서 지금은 쇠파이프 대신 컴퓨터 자판을 치고 있다. 이렇게 세월은 잘도 흘렀고 세상은 무심하게 잘도 변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왜 11년 전과 다름이 없는지 참으로 갑갑한 노릇이다. 지금의 쌍용차는 11년 전의 현대차와 똑같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공장을 점거하고 굴뚝 위로 올라가는 최후의 선택까지 했다. 정부와 사측이 헬기를 통해 공장 위에서 삐라를 뿌려대는 것도 예나지금이나 여전하다. 노동자들은 11년 전과 똑같이 “정리해고만은 안 된다”며 울고 있고, 자본은 지금도 “정리해고만 되면 경제가 살아난다”고 주장한다. 11년 전 현대차 노동자들이 불렀던 노래를 지금 쌍용차 노동자들이 부르고 있고, 현대차 노동자들이 외쳤던 “정리해고 분쇄” 구호는 지금 쌍용차 공장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없는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 현실은 좀 처럼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세상은 노동자과 없는 민중들을 향해 “과거와 똑같이 싸운다” “유연하지 못하다”고 손가락질을 해댄다. 변한 것에 취해 변하지 않은 것이 안 보이는 것일까, 아니면 변한 것이 좋아 변하지 않은 것이 밉고 촌스럽게 보이는 것일까? 11년 동안 싸웠지만 여전히 똑같은 걸 외쳐야 하는 노동자의 속만 까맣게 타들어 간다는 것을 알려 하지 않는다. 전국적으로 비가 오니 2009년 장맛비가 평택 쌍용차 공장 지붕을 때리고 있을 것이다. 1998년 울산 현대차에서 들었던 것과 똑같은 그 빗소리가 옥쇄파업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심장을 때린다. 이런 날이면 쉽게 잠들지 못할 것이다. (곰배령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