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충격적인 죽음은 전체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무수한 논란과 투쟁을 낳고 있다. 노무현의 죽음에 대해 이제 잠시 동안 자제했던 할 말을 이제 하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를 자제했던 것은 최소한 죽은 ‘인간에 대한 예우’를 강조하는 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약속을 지켰다. 그것은 노무현에 대한 정치적 입장과 평가가 잘못됐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노무현의 충격적인 죽음으로 인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쟁을 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분들은 또 다시 노무현의 추모기간이 지났는데 또 다시 이러한 논란을 반복할 것이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고인의 충격적인 죽음이라는 이유로 노무현에 대한 정치적 평가를 뒤로 미룰 수는 없다. 노무현에 대한 평가는 단순히 한 개인에 대한 평가도 아니고 지나간 시절에 대한 맹목적 향수나 과거에 대한 평가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무현에 대한 평가는 저 잔인무도한 이명박 정권에 대한 투쟁과 연관이 돼 있고, 촛불투쟁의 정체성과 이후 전망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명박 정권을 반대하는 우리가 지향하는 민주주의의 계급적 성격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여기서 많은 얘기를 하지 않고 일단 논쟁과 토론을 위한 화두만을 던지고 이후 더 많은 얘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과연 인간 노무현과 그의 정책이 별개인가?
진보진영의 논객인 진중권은 ‘인간 노무현과 그의 정책은 별개’라고 했다. 그의 말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많은 진보진영의 정치세력과 노사모, 노무현을 추모하는 분들은 고인이 된 노무현에 대한 인간적 예우를 말했다. 이러한 구분법이야말로 말이 안 되는데, 노무현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노무현의 정치적 행위에 대해서 비판했지, 인간 노무현에 대해 악의적으로 비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노무현에 대한 인간적 감정 뒤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포장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진중권은 정책과 별개로 인간 노무현을 말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표현하지 말고 차라리 ‘정치적 인물’이었던 노무현에 대한 솔직한 자기 입장을 말해야 한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했다.
▲ 2006년 6월 10일 부터 서울에서 한미 FTA 2차 협상이 열리기로 한 가운데 9일 오후 협상회의장인 장충동 신라호텔 주변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경찰이 경비를 강화하고 있다. 헌법기관인 국회의원들의 출입조차 막았다. (사진:연합뉴스)
자본의 목적은 이윤 추구임은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자본의 인격화된 화신으로서 자본가는 이윤을 남기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지 노동자의 임금을 깎고, 복지를 후퇴시키고, 자본의 위기 앞에서는 노동자를 정리 해고시켜 가면서 살아남으려 한다. 그것이 바로 아름다운 기업 대한통운이 박종태 열사를 참혹한 죽음으로 몰아놓은 원인이 됐고, 한국타이어에서 수많은 노동자를 기업 살인이라고 부르는 산업재해와 직업병으로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인이 되며, 인간 이건희가 자본의 화신이 되어 무노조 정책을 쓰며 노동자에 대한 감시와 억압, 테러와 납치를 아랑곳하지 않고 노조파괴 행위와 노동탄압을 자행하는 원인이자 추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노무현과 그의 정책이 별개인가? 노무현은 한때 민주주의 투사로서 노동자민중의 투쟁에 열성적으로 같이 하고, 가난하고 소외받은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했다. 그러나 집권자로서 노무현은 노동자 민중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집권자로서 노무현은 인간 노무현과 서민적 풍모와 다르게 농민을 백주대낮에 때려죽이고, 철거민과 노점상을 탄압했다. 농민 사망 사건에 대해 ‘경찰력의 과도한 진압으로 인한 사고’라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에 사과를 하긴 했으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야 말로 빛 좋은 개살구다. 노무현 정권은 비정규직법과 노사관계법을 개악하여 비정규직을 확대하고, 정리해고 하고 전체 노동자들의 숨통을 조여 가며 사정없이 공격했다.
▲ 비정규직 노조원들에 대한 차별없는 고용을 요구하며 매장 점거 농성을 벌여온 서울 상암동 홈에버 매장에 2007년 7월 20일 오전 경찰이 투입돼 김경욱 이랜드 일반노조위원장(가운데) 등 조합원들이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사진:한겨레신문)
촛불투쟁은 이제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노무현에 대한 상상을 불허할 정도의 추모행위는 노무현에 대한 지지도 포함돼 있지만 이명박의 잔학무도한 민주주의 파괴와 억압정책에 대한 분노와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노무현에 대한 추모는 이명박 정권에 대한 투쟁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에 대한 제대로 된 투쟁을 위해서 우리는 노무현에 대한 추모가 가진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도 얘기를 해야 한다. 그것은 촛불의 이후 전망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민주주의 파괴와 노동자민중의 억압에 대한 탄압, 전직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추모마저도 폭력으로 가로막고 있는 이명박에 맞서 단결해서 투쟁해야 한다.
이것이 촛불을 촛불로서 통일성을 유지하게 하는 정체성이다. 그렇다면 이명박의 민주주의 파괴에 맞서 우리는 앞으로 어떠한 민주주의를 만들어가야 하는가? 과거 노무현 집권 시절의, 열린우리당의 민주주의로, 지금 민주당으로 집결해 있는 민주당의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하는가? 평화적인 촛불투쟁은 이명박의 거대한 폭력 앞에 무릎 꿇었다. 거대한 다수의 촛불투쟁은 이후 소수 헌신적 촛불활동가 사이에서 간신히 명맥을 이어왔다. 이들 촛불 활동가들은 언론통제에 맞서,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지역촛불로, 또는 비정규직 투쟁과 연대했다. 용산 철거민 학살이 다시 촛불투쟁을 부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지만 이 또한 이명박의 무자비한 투쟁으로 작년과 같은 투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촛불투쟁이 민주주의 일반을 위한 투쟁에서 더 나아가 비정규직 투쟁과 결합하고 용산철거민 학살 같은 민중투쟁에 결합하는 것에서 촛불투쟁의 전망을 보았다. 이 촛불투쟁이 노무현의 죽음으로 다시 타오르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촛불투쟁이 작년과 같은 거대한 투쟁으로 나아가려면 이명박 정권의 폭력적인 거대한 물리력을 뚫고 나가야 한다. 조직화 되지 않은 촛불 100만은 명박산성 앞에서, 아니 우리 스스로가 만든 비폭력이라는 틀 앞에서 주저앉았다. 이명박은 이 틈을 타서 국가권력의 거대한 폭력으로 촛불을 진압했다. 지난 5월 16일 화물연대의 투쟁은 조직된 노동자들이 결사적으로 투쟁한다면 잔악한 경찰 폭력에 밀리지 않고 제대로 투쟁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반면 노무현의 죽음으로 이명박 정권에 대한 타오르는 분노는 수십만이 모인 영결식 이후 이명박 정권의 물리력 앞에서 또 다시 차벽에 부딪히고, 경찰 몽둥이 앞에서 힘겨운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민주주의 투쟁을 외치는 촛불투쟁이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의 민주주의, 현재 민주당의 민주주의를 넘어야 하며 전술적으로는 비폭력 평화투쟁의 한계를 넘어 이명박 정권의 주구인 경찰의 폭력에 맞서 싸워야 한다. 노동자계급과 민중들의 투쟁과 연대해야 하고, 이것이 촛불투쟁이 다시 부활하고 노무현의 형식적 민주주의를 딛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이제 우리의 방어를 위해 짱돌을 들고 바리케이트를 쳐야 한다. (한토마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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