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비골 상수리나무를 내려가면서
북풍한설 몰아치던 엄동설한을 보내고 달빛고운 마을 달비골 상수리나무에도 봄은 찾아왔습니다. 잘려나간 나무들의 상처 마냥 꽃샘추위가 몰아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수리나무 위 우리들의 작은 성인 ‘나무 위 농성’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봄이 벌써 왔음에도 불구하고 시샘하는 꽃샘추위는 우리를 잠시 움츠리게 합니다. 그러나 정작 추운 건 우리 몸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새 봄이 이미 왔기에 새 생명을 틔울 준비에 바쁜 나무처럼 희망이라도 있다면 이깟 추위쯤이야 너끈히 견뎌낼 자신이 있습니다. ‘봄은 왔으나 봄 같지 않다’는 말이 딱 맞는 시점에 제가 상수리나무 위를 내려오려니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아마 앞산을 아끼는 많은 분들과 앞산꼭지들의 마음 또한 같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진행 중인 인권의 역주행과 곳곳에서 벌어지는 용병을 동원한 건설자본의 강제 철거를 지켜보면서, 저 중동 땅에서 벌어지는 야만적인 살육전과 ‘이명박의 화려한 휴가’인 용산 살인을 목도하면서 우리 마음은 이 땅 민중들의 가슴과 이곳 달비골의 봄이 멀지 않았는가 하는 두려움에 심히 떨기도 합니다. 가자 지구를 초토화시키고도 불꽃놀이를 즐기듯 좋아하는 이스라엘의 공격 또한 우리를 깊은 슬픔에 잠기게 합니다.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의 경험에서 도대체 무엇을 배웠던 것일까요?
자국의 이익만을 앞세워 무고한 어린이와 여성의 생명마저 저렇듯 무차별로 빼앗는 일이 도대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까? 20세기의 야만의 역사를 똑바로 인식하고 평화와 인권과 생명의 소중함을 발견하지 못하는 한 바로 선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땅이라 해도 봄이 온다’는 것은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굽은 것은 곧은 것 위에 오래 놓이지 않는 것 역시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이를 믿기에 우리는 매서운 바람과 두려움이라는 마음의 한파도 떨치고 일어선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질 줄 알고 달려들었고 패배할 각오하고 뛰어든 싸움이지만 막상 밀리고 보니 속이 상합니다. ‘삼촌 건강 이상없으시다니 다행이라’며 불의 앞에 ‘절대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라’는 평소 제가 한 말로 ‘아름다운 패배를 할 줄 아시라’며 오히려 위로 하는데 가슴이 뭉클해 옵니다. ‘가진 놈한테 맞고 분통해 할 삼촌의 얼굴이 눈에 선해 걱정’이라며 ‘꽃샘추위는 마지막임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말에 눈물이 핑 도네요. ‘그래도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챙기는 건 잊지 말라’며 패배 의식에 젖어 헤매고 있을지 모를 아제비를 걱정해 주는 마음이 고맙기만 합니다.
꼭 남겨야 할 앞산꼭지들의 기록
달비골에서 용두골까지 4.5킬로미터, 파동을 지나 범물동 법니산까지 포함하면 무려 10.5킬로미터로 25리가 넘는 엄청난 콘크리트 덩어리를 도심에다 민간투자사업이란 이름으로 포장해 땡빚을 내여 만드는 미치광이 짓을 두고 볼 수 뛰어든 싸움, 머리 잘 굴리는 인간들은 벌써 사라져 버리고 달비골 곳곳을 누비며 철 따라 어떤 생물이 사는지 일일이 찾아 기록을 남기고, 자연을 사랑하는 우직한 사람들만 남아서 대구시와 건설자본을 상대로 본격적인 싸움을 했습니다. 거인 골리앗과 작은 다윗의 싸움과 같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우린 붙었습니다. 속을 알지 못한 저들로서는 어디서부터 시작이고 어디까지가 마지막인지 모르니 정체를 파악하는데 엄청나게 진을 빼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거기에다 일이 벌어지면 온 종일 찍어대는 이경희 꼭지의 기록은 저들을 더 당황하게 했습니다.
조직의 생명은 사람과 돈인데 둘 다 부족해 처음부터 버거운 싸움이었습니다. 서울의 사패산이나 인천 계양산의 사례가 있긴 하지만 척박한 대구와는 토양 자체가 다르니 단순 비교는 무리라고 봅니다. 이런 상태로 싸움을 했으니 대구시와 경찰은 지금도 오리무중에서 헤매고 있을 줄 압니다. 그 중심에 끈질긴 ‘땅과 자유’의 젊은 동지들이 서 있었음을 우린 잊지 않습니다. 맞을 줄 알면서 맞으면 덜 아프듯이 질 줄 알고 뛰어든 싸움에 졌기에 그리 아프진 않으나 분통 터지는 것은 어쩔 수 없네요. 이기고 싶고 구체적인 성과물을 남기고 싶은 것은 우리 처지로서는 무리요 욕심인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아름다운 패배’를 말했는지도 모릅니다.
이 힘들고 어려운 싸움에 많은 분들의 정성이 함께 했습니다. 이름 모를 분들이 찾아와 반찬도 챙겨주고 후원도 해 주셨습니다. 그런 정성이 모아졌기에 100일 넘게 ‘나무 위 농성’까지 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준비가 미비한 것도 사실이었고 단일 조직이 아니다 보니 보안 유지를 비롯한 여러 어려운 점도 있었습니다. 그런 악 조건을 무릅쓰고 농성을 했으니 담당 기관원은 ‘총 맞은 기분’이었을 겁니다. ‘나무 위 농성’을 한 탓에 저는 졸지에 대구 바닥에 얼굴 팔리는 호사를 누리고 있어 고생한 분들에게 미안하기만 합니다. 다음에 이런 싸움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좀 더 치밀하게 준비를 해 쉽게 지금보다 더 끈질기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가는 시민들의 눈에 보여야 하기에 달비골 들머리에 농성장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조용한 곳이라면 너 댓 달은 견딜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파업 투쟁에 지더라도 조직을 남겨야 하듯이 앞산터널이 뚫린다 해도 앞산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정성과 마음은 남겨야 한다고 믿습니다. 매일 밤하늘을 쳐다보면 시내 쪽과 달비골이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골짜기 안은 별을 환하게 볼 수 있으니 도심 인근에 이렇게 공기 맑고 생태 보전이 잘 된 곳은 없습니다. 상화로도 출퇴근 시간 대 말고는 차가 그리 많이 다니지 않는데 뒷거래로 검은 돈 잔뜩 챙겨 놓고 교통 수요 예측을 엉터리로 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는지 모를 일입니다.
이제 대한민국 정부가 떠 안겨 준 외상값 정리도 해야 되고, 이래저래 밀린 일 처리를 하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자식들에게 부끄럽기 않은 것인지를 다시 한 번 되돌아 보려합니다. 용두골 벌목 저지 싸움부터 달비골의 싸움을 글로 적으려합니다. 애비 노릇 제대로 못한 증거를 남기기 위해서라도 꼭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 몇 일 동안은 달비골을 걸으면서 파괴된 숲을 보면서 분노도 하고 마음을 좀 가라앉히려 합니다. 꽃샘추위가 아무리 발악해도 밀려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자연의 섭리임을 우린 잘 압니다. 제가 나무 위에서 내려올 뿐 농성과 이 싸움은 새로운 방식으로 계속 이어갑니다. 자연 가까운 곳에서 뭇 생명들의 소리를 들으며 보낸 기간이 제게는 새로운 수행의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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