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형수님에게.
그 동안 잘 지내시고 요즘 건강은 좀 어떤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기승을 부리던 겨울도 지나고 정월 대보름도 지났네요. 다음 주면 겨우내 얼어붙었던 대동강 물도 녹는다는 우수라 아무리 꽃샘추위가 오는 봄을 시샘한다 할지라도 밀려나지 않을 재간이 없을 것 같군요. 대구의 어머니산인 앞산을 뒤덮고 있는 어둠과 겨울 세력 역시 달비골의 봄소식에 도망가지 않고는 배길 재간이 없건만 발악을 하고 있어 여러 사람들의 애을 태우고 있답니다. 이번 설에도 못 뵈었지만 ‘집안 재산 도둑질한 인간들과는 상종 못한다.’는 시동생의 똥고집 때문에 명절에 얼굴 못 본지 오래되었지요?
스물여섯 새댁이 어느 덧 오십대 중반이 되었으니 세월 빠르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군요. 형수와 인연을 맺은 지 30년이 되었는데,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면서 영원한 청년 같던 시동생도 이제 나이 쉰의 문턱에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이 깐깐한 인간이 우리 집안에서 유일하게 속내를 털어 놓아도 언제나 받아준 내게는 누님 같은 형수, 꼭 술 한 잔 걸치고 밤늦게 전화해 많이 괴롭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형님 세상 떠난 후 그 동안 고생만 하고 살아오셨는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해 뵐 낯이 없네요. 정민이와 보라가 진학할 때 등록금 한 번 보태지 못했으니 부끄럽고 죄송하다는 말 밖에는 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어차피 먹은 재산인데 고소 안 할거 면 대충 넘어갈 법도 하련만 저도 황소고집이라 잘 안 되네요. 힘없는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항의의 표시인 이것만은 접을 수가 없으니 형수님의 양해를 구해야 되겠습니다. 먹고 살기 힘든 처지도 아닌데 무슨 욕심이 그리도 많은지 조카에게 ‘집안 재산 도둑질한 상종 못할 인간’이란 욕까지 얻어 먹어가면서도 부둥켜 쥐고 있는 것을 보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게 아니라 갑갑하고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저 보다 세게 나올 줄 알았던 동생이 가만히 있어 의아하고 놀라셨죠? 형제가 ‘상종 못 한다’고 하다가는 원수질 것 같아 고육지책으로 양보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습니다. 고민 끝에 결정한 동생의 선택이니 존중하는 게 맞을 것 같아 저 혼자만 상대 하지 않고 얼굴 안 볼뿐 굳이 묻지도 않았습니다.
시동생의 이런 고집 때문에 큰엄마가 되어 하늘의 해 같은 질녀인 해린이도 못 봐 섭섭하시죠? 해린이를 그리도 귀여워하고 좋아한 보라와 정민이가 더 서운해 할 것을 떠 올리면 제 가슴이 메어져 눈물이 나지않을 수 없죠. 언젠가 ‘그만 하면 안 되느냐’고 말씀하셨을 때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고 형수가 섭섭할 정도로 매정하게 잘라 무척이나 마음 상하셨을 줄 압니다. 그렇지만 저의 지금 처신은 ‘잘못된 것에 대한 최소한의 항의’라 결코 타협이나 양보의 대상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커 가는 조카들 때문이라도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끝까지 누군가는 말해야 하는 몸짓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아마 ‘내 죽고 나서 하라’는 아버지 말씀이 없었더라면 벌써 형사고소에다 민사 소송까지 가고 난리가 났을 겁니다. 아무리 고집 센 윤희용이지만 아버지의 그 말씀 앞에 ‘상종 안 한다’는 선에서 마무리 할 수 밖에 없더군요. 이제 공소시효가 지나 사건화 하지도 못하게 되어 어쩔 방법도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지금 대구의 허파이자 심장부인 앞산터널 저지 싸움을 위해 달비골 상수리나무 위에 올라와 있습니다. 인근아파트 7층 높이와 비슷하니 약 18미터 가량 됩니다. 아마 보라와 정민이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이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맨 날 청춘인줄 아느냐’고 형수가 걱정하실까봐 아무 말씀 안 드린 것이니 오해하지 않으실 줄 압니다.
이 문제 역시 서로의 생각이 다르니 양보하고 협상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에 대한 저항’이라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라 각오하고 올라와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나서면 좋겠지만 강요해서 될 일도 아니고 파급효과를 감안한다면 나이 먹은 사람이 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에 제가 나서게 되었습니다. 나이 들어서 제가 이런 ‘선한 싸움’에 평화의 도구로 쓰인다니 기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영광이기도 합니다. 휴대전화 없으면 하루도 못 살 것 같더니 없이 살아도 아무 탈 없는 걸 경험하면서 너무 바쁘게 떠 밀려 살아온 지난날을 되돌아보곤 합니다. 뭇 생명들이 꿈틀 거리는 하느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작품 한 가운데 들어와 성찰과 수행을 하고 있으니 귀한 선물을 받은 셈이지요. 추운 겨울을 이곳 대구시립기도원에서 보내고 봄을 맞는 길목에 서 있으니 감회가 남다르고 새롭기도 하네요.
찬바람에 노출되어 몸에 탈은 생기지 않을까 걱정 했는데 다행히 건강한 몸을 허락하신 하느님의 은혜로 잘 넘기고 있습니다. ‘우리 몸은 하느님의 영이 머무는 성전’이란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주신 소중한 몸 관리를 잘 해 온 보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달비골 초입에 자리 잡고 있어 골바람이 센 곳이라 기온이 제법 떨어지는데 어떻게 보낼지 걱정을 하지 않은 게 아니지만 수시로 건강 확인하면서 지내니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10여 년 동안 제 몸을 믿고 맡겨 건강 상태를 잘 아는 주치의사인 후배가 가까이 있어 마음이 한결 푸근합니다. 가끔 편지로라도 안부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진보고 시동생이 너무 말랐다는 걱정대신 몸 관리 잘한 것이라 보시면 됩니다. 늘 하느님의 평화가 사랑하는 형수와 질녀들에게 함께 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앞산 달비골 상수리나무 위에서 못난 시동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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