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고사 대신 체험학습을 허락했다가 부당하게 해고 된 서울 광양중학교 윤여강 선생이 졸업하는 제자들에게 “자기 생각 뚜렷한 것도 좋지만 남의 말도 중요하게 생각하며 지내자. 잘못된 것에 굴복하지 말자.”며 마지막 말을 한 기사를 보면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함께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습니다. 사제인 후배와 나눈 가슴 아픈 사연을 제 누리방(블로그)에 올렸다가 “형님, 제 처지가 곤란하게 되었습니다.”며 지워 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 화도 나면서 슬퍼하지도 못하게 강요하는 이 엉터리 세상이 너무 어이없어 그냥 울었습니다. 전에는 분노만 하고 우는 것은 따로 했는데 이젠 뒤섞이니 어찌된 영문인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달비골 상수리나무 위로 온지 40여 일이 되었는데, 구체적인 사안을 놓고 이렇게 오래도록 직접 싸우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평소 몸 관리를 해 온 탓에 적응이 쉬웠다는 것을 직접 경험하면서 ‘기회는 준비하는 자의 것’이란 평범한 말을 절실히 느낍니다. 산을 좋아하지만 그냥 산행만 했을 뿐 천막에서 잠을 자본 지 20년 가까워, 올라가겠다고 큰 소리 쳐 놓고는 적응훈련 하다 고생을 해 겁이 났던 것도 사실입니다. 일주일 정도 지나니 인천 계양산에서 150일간 나무 위 생활을 했다는 윤인중 목사가 견딘 ‘비법이 이런 것이구나.’라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언제 죽어 나갈지 모르는 현장에 직접 있어 보니 생명 하나하나의 아픔이 어떤 것인지, 절실히 가슴에 와 닿기 시작해 이게 자기 수행의 길이요, 많은 생명과 ‘더불어 살아가라는 하느님의 준엄하신 명령이 아닌가’라는 고백을 감히 해 봅니다. 형편이 괜찮을 때 사 놓았던 각종 기능성 등산장비가 한 몫을 담당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 일제고사 선택을 허락했다가 부당하게 해직된 서울 광양중 윤여광 교사에 대한 제자들의 마음이 담긴 글. 평소 학생들의 신뢰가 얼마나 돈독한지 보여준다.
나무 위 농성을 하면서 쓴 제 글이 ‘너무 가슴을 아프게 하다가 너무 과격해 헷갈린다.’는 말을 듣습니다. ‘슬퍼하거나 분노하지 않는 자는 결코 ××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히랍의 시인 네크라소프의 말처럼, 철학에서 말하는 사물의 양면성이기도 하죠. 연말 그리스 민중들의 치열한 저항을 보면서 ‘우리는 왜 저렇게 못 싸우는가’ 한탄도 하고, 이스라엘의 잔인하기 그지없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집단 살인을 보면서 끌어 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용산 참사는 철거를 직접 당한 당사자로서 더 큰 분노와 가슴이 메어져 옵니다. 나이 쉰이 된 자식이 하는 일에 늘 노심초사 하시는 부모님에 대한 죄송한 마음과, 애비가 되어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자식 걱정에 혼자 울기도 합니다. 입산하기 전 보다 그 강도가 더 높아진 것을 보고 풍부해진 감성에 제 스스로 놀라곤 합니다.
허물투성이인 저를 좋게 봐주는 고마운 분들이 많이 있지만, 너무 따지고 깐깐하다는 평가는 늘 같이 따르곤 하지요. 그렇게 정의롭게 살아오지 못했는데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사람’이라는 과찬을 들을 때는 몸둘 바를 모르겠더군요. 지금보다 더 바르게 살아가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불의 앞에 굴복하지 않는 게 칭찬에 보답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나 보다 약자를 괴롭히거나 건드리지 않고 살아 왔다고 자부했는데, 어느 날 저도 약자가 당한 폭력 사건을 묵인하고 넘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회의할 때 일어난 일을 말이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가 괴롭고 힘들어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피해자의 동의를 얻어 문제 제기를 했습니다. 미흡하나마 징계 결과가 나오자 피해를 당한 분은 ‘이제 속이 시원하고 잠이 제대로 온다.’면서 고맙다고 하는데 그 동안 눈 감고 살아온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 후 가해자는 징계 절차도 이행하지 않은 상태에서 또 심한 막말과 욕을 하는 등 2차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혀 밑에 도끼 있다’는 속담처럼 언어폭력이 얼마나 무섭고 상처가 큰지 모르는, 폭력이 철저히 내재화 되어 있어 그게 폭력인지 조차 분간하지 못하는 꼴은 어찌 보면 불쌍하기도 하더군요. “제대로 정리하지 않으면 다시 문제 제기를 하겠다”고 하자 허둥대더니 결국 그냥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저는 괴로워하며 가슴 아파 했는데 가해자는 아무 일 없는 것 처럼 돌아 다녀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문제를 삼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찾아와 ‘내가 잘못했다’는 말 한 마디만 했더라도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그럴 기미가 전혀 안 보이더군요.
이 일 역시 평가가 정확히 양쪽으로 갈라져 폭력 사실을 안 여성단체에서는 ‘윤 선배답게 장타를 쳤다’며 격려해 주었지만, “유별나다. 도덕적인 결벽증”이라는 말과 함께 “일 잘하는 사람 죽인다”는 심한 말도 들었습니다. 험한 건설현장에서 살아남으려다 때가 많이 묻어 영혼이 걸레가 된 줄 알았던 내게 이런 양심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습니다. 그것도 바로 한 칼에 처리하지 않고 1년 넘게 ‘가슴앓이 할 줄 아는 여유’가 있음에 놀라기도 했고요. 예전 같으면 분노하면서 ‘그냥 안 둔다’고 할 줄 알았지 슬퍼하지는 않았는데, 이젠 분노와 슬픔이 같이 오는 것을 보니 삶의 연륜이 조금씩 쌓이는 것 같습니다. ‘사람 죽인다’고 하는 사람들은 저의 이런 ‘아픔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런 말을 한다’고 이해까지 할 정도니 많이 나아진 것이죠.
상수리나무 위에 자리 잡은 우리 앞산꼭지들의 작은 성에 혼자 있다 보니 이런저런 고민도 하고, 보는 사람 없으니 눈치 보지 않고 울 수 있어 참 좋더군요. 아니, 나무 위 농성을 하면서 분노와 슬픔이 더 많아졌죠. 앞산터널 반대 싸움이 시작되었을 무렵 ‘환생교’ 교사들이 달비골 곳곳을 누비며 사진을 찍고, 어떤 생물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찾아다니며 자료를 모을 때 ‘되게 한가롭다’는 덜 떨어진 교만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여유 있는 일’로 치부했던 오만을 깨기까지 제법 시간이 흘러야 했습니다. 언젠가 그 오만에 대한 고백과 빚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던 중 용두골에 불법 벌목이 시작되면서 제 몸이 앞산꼭지들과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 잘나고 똑똑하던 무리들은 다 사라지거나 마이크 잡을 때 아니면 안 나타나지만, 지금까지 남은 것은 생명체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여기던, 어쩌면 셈에 어두운 사람들뿐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생명을 알기에 잘난 인간들이 멀리하는 힘겨운 싸움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앞산꼭지들이 제게 강력한 성분의 각성제를 준 셈이죠. 나무 위에 올라와 있는 저를 보고 ‘큰 일 한다’고 하는 분들의 과찬에 겨우 빚 갚는 처지인 저로서는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이 빚만은 갚아야 살아가는데 편하겠다는 생각에 내가 잘 할 수 있는 게 이것이라 선택한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솔직히 자동차 소음만 없으면 윤인중 목사의 기록도 깰 수 있겠다는 건방진 생각을 해 보는 것은 뭇 생명들의 신음하는 소리가 제 귀에 들려오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이 앞산터널 저지 싸움은 ‘잘못된 것에 대한 분명한 저항’이라 더 굴복할 수 없지요. 이 싸움에 무릎 꿇는다면 ‘약자에게 양보하고 불의 앞에 지지 말고 살아라’고 자식과 조카들에게 사기 친 것임에 분명하지요. 날이 풀리면 어떻게 밀고 들어올지 모르는데 생명을 죽이는 그 사악한 짓에 ‘그냥 밀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내 자식 낳아 키우면서 그냥 좋았던 조카들이 더 사랑스러웠듯이 생명체 하나하나를 보면서 이것을 지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지키는 ‘선한 싸움’임을 깨닫습니다. 앞산의 많은 골짜기 중에도 이 달비골이 제게는 생명 사랑에 대한 기도처가 되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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