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대중 여러분!
오늘 우리는 살기 위해 몸부림치다 죽어간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같은 하늘을 머리에 두고 살아온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를 하고자 추모와 천도의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하늘과 땅을 울릴 만큼 애통해 해도 죽어간 이들이 살아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들의 추모는, 벼랑 끝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들어 주지 못한 우리 사회의 냉혹함을 성찰하고, 폭력적이고 반생명적인 삶의 구조를 냉철하게 바라보고, 이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진정한 추모일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를 외면한다면 제2 제3의 용산 참사는 계속될 것이고, 우리 모두는 언제 그들과 같은 곤경에 빠질지 모르는 불안에 시달릴 것입니다. 아니, 현 정부는 국민 모두에게 그러한 공포를 내면화시킴으로써 가장 쉬운 방식으로 국민을 다스리려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이 나라 민주주의가 처한 위기의 본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죽었습니다, 천재지변에 의해서도 아니고 사고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 무력도 불사하는 정부의 개발 정책이 부른 예고된 죽음이었습니다. 생존권을 외치는 국민을 마치 전쟁터의 적군 대하듯 한 공권력 남용의 결과입니다. 그런데도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대통령의 참회가 없습니다. 법적 책임을 떠나서 도덕적 책임을 통감하는 모습은 조금도 볼 수 없습니다.
만약 대통령이 진심으로 국민의 편에 서서 눈물을 흘렸다면, 누구도 그 모습을 사법적 판단 기준으로는 바라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책임 전가에 급급한 모습이었습니다. 경찰청장이 할 일까지 대신하여 책임공방으로 문제의 본질을 희석시키려 합니다. 진상규명이나 책임자 처벌은 우선순위를 따질 일이 아니라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대통령이 그토록 강조하는 ‘준법’은 목숨부터 살려 놓고 해도 늦지 않았습니다. 이번 용산 참사의 본질은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할 국민의 기본권을 가벼이 여기는 정부의 천박한 인권의식입니다.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될 이번 용산참사와, 사고 이후 보여준 정부 여당의 태도는 피도 눈물도 없는 우리 사회의 냉혹한 가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참으로 절망적입니다. 하지만 분노로써 절망을 이겨낼 수는 없습니다. 자비와 정의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세상 그 어떤 법보다 높고 무거운 우리 내면의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양심의 명령에 따름으로써 통치자와 권력자들이 부끄러워하고 참회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모두가 사는 길입니다.
사부대중 여러분!
‘경제 위기’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는 그 마음부터 좀 내려놓는 게 어떻겠습니까. 죽음도 불사하는 ‘경제 살리기’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경제 살리기입니까?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못할 짓이 없는 세상이라면, 경제가 살아난다 한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물론 지금도 세 끼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해결하는 길은 경제 살리기가 아니라, 사회를 정의롭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모두 함께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누구나 우리 사회의 빈부 양극화를 걱정합니다. 부자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양극화는 갈수록 심화되고 있습니다. 부자는 20%에서 아래로 추락할까 봐, 가난한 사람은 20% 안으로 들려고 아등바등하기 때문입니다. 모순인 줄 뻔히 알면서 모순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정부는 경제 살리기를 명분으로 전 국토를 파헤치고 국민의 뜻에 반하는 온갖 악법의 입법을 강행하려 합니다. 이러한 국정 운영은, 다수의 국민들에게 정부 정책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으면 서민은커녕 언제 빈민으로 전락할지 모른다고 위협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모든 국민들을 수전노로 만들어서 만인 대 만인의 경쟁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이건 아닙니다. 더 이상 미망의 놀음판에 끼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해야 할 때입니다. 부자는 가진 자의 사회적 책무를 통하여, 자신의 부를 명예롭게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단순 소박한 삶을 통해 자존을 높이는 공생의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국민이 현명해져야 합니다.
사부대중 여러분!
더 늦게 전에 선택을 해야 합니다. 조금씩 양보하여 모두가 행복한 사회로 갈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계속 살인적 경쟁을 하면서 모두가 불행해질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용산 참사는 우리에게 가장 비극적인 방식으로 선택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대다수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정부에 맡길 일이 아닙니다. 권력을 지키는 데 급급한 여당에 맡길 일이 아닙니다. 알량한 기득권 지키기에 연연하는 무력한 야당에 맡길 일이 아닙니다. 야당만이라도 진정으로 국민들 대변했다면 의원직을 던지고서라도 정부 여당의 폭주를 막았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도 국민은 없습니다.
저는 불문에 귀의한 수행자의 한 사람으로서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자괴감과 비통함을 느낍니다. 세상이 이 지경인데 종교는 왜 있어야 하는지, 과연 누구를 위한 종교인지, 수행의 의미는 무엇인지, 성직자가 왜 필요한지, 그 존재 의미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종교라도 제 구실을 했다면 세상이 이지경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특히 제가 몸담고 있는 불교계는 입만 열면 중생구제와 정토구현을 말합니다. 과연 생존의 벼랑에서 신음하는 이웃을 두고 어디에 있는 중생을 구제할 것이며, 지금 여기를 떠나 어디에서 정토를 구현할 것입니까.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없다 했습니다.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있는 부처가 죽어가고 있는데 어떻게 불조의 혜명을 이어가겠습니까.
“중생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는 대승보살의 정신은 저자의 상품처럼 뒹굴고 있을 뿐입니다. 세상을 법당으로, 온 생명을 부처로 섬기는 발심을 새로이 하지 않으면, 앞으로 한국 불교는 희망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밝혀 보이신 진리에 의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을 것입니다. 정치인은 말할 것도 없지만 지식인을 비롯한 전문가 집단도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는 종교계도 지성계도 다 무너졌습니다. 사회적 지도층이라 할 만한 집단이 없습니다. 기득권에 안주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절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내면의 양심마저 사라지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부대중 여러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양심이 희망입니다. 이제는 그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것의 명령에 따라 살아가십시다.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자각하는 것. 그것이 희망의 출발점입니다. 우리 모두 ‘자타불이’의 정신으로 세상을 바꾸어 갑시다. 그것만이 진정 용산참사를 추모하는 길일 것입니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불기 2553년 2월 5일
화계사 주지, 불교환경연대 상임대표 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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