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빨도 없고 손가락도 없고. 30년 넘게 산 내 남편을 알아보지 못했다. 불에 타 죽었으면 이빨이 없을 이유가 있냐. 손가락이 없을 이유가 있냐. 불에 타죽은 것이 아니라 맞아 죽은 것이다. 차라리 화재로 죽었으면 기도라도 막혔을 텐데. 시신을 공개해서라도 진실을 찾겠다. 마음 같아선 이명박 대통령과 김석기 경찰청장을 내 남편과 똑같이 하고 싶다.”
1월 29일 강제진압 현장에서 숨진 양회성 씨의 부인 김영덕 씨가 가슴 속에 묻어둔 이야기를 꺼내놓았습니다. 남편을 또 다시 죽일 수 없어 망설였던 시신 공개입니다. 땅부자인 서울 용산구청장이 ‘장사를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외친 세입자들을 ‘떼잡이’라고 불러 가슴에 못질을 했습니다. 시신공개를 하면 ‘남편 팔아 돈 달라고 하는 떼잡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들을지언정, 죽은 게 원통해서 이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게 억울하게 남편을 잃은 50대 중반 여성의 절규입니다. 유동 인구가 많은 용산에서 실평수 100평의 식당을 운영하며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던 한 가정이 순식간에 폭삭 내려앉고 말았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 역시 철거민의 자식입니다. 그래서 용산에서 참사를 당한 분들과 유족들의 아픔이 남의 일 같지 않고, 철거라면 30여 년의 세월이 가까워오는 지금도 치가 떨리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대구시 중구 대봉동 대백프라자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은 일명 ‘두부촌’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한국 전쟁 후 피난민들이 하천 부지에 자리를 잡으면서 형성되기 시작한 동네인데 먹고 살기 힘든 시절 두부공장이 몇 군데 있었습니다. 다른 생계 수단이 없던 가난한 사람들이 대구시내 곳곳을 누비며 두부를 팔러 다녀 그런 이름이 붙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끼니 염려하던 그 시절에 저희 남매는 부모 잘 만나 세끼 걱정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부지런하기 그지없었던 아버지는 대봉동에서 달성 논공장은 물론이고 현풍장과 고령장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서 쌀을 사올 정도로 삶의 의욕과 열정이 대단하셨습니다. 지금은 잘 닦인 국도를 따라 자전거 타고 가라고 해도 피할 그 먼 길, 자갈이 튀는 비포장길을 쌀 너 댓 가마니 실고 달렸으니 상상한 해도 놀랄 일입니다.
중학교 시절부터 우리 형제들은 주말이면 자전거로 쌀 몇 말 정도는 배달을 했고, 고등학교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한 두 가마니는 실고 다닐 정도가 되었습니다. 쌀집을 하면 대부분 연탄을 같이 하는데 언덕을 올라가려면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여유 공간이 있는 집은 장마철이 끝나고부터 연탄을 들여 놓습니다. 그래야 잘 말린 연탄을 가을부터 겨우 내내 땔 수 있기 때문이지요. 연탄 창고가 따로 없는 집은 마루 밑에 연탄을 넣는데 스무 장 정도만 넣고 나면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곤 해 정나미가 뚝 떨어지곤 했습니다. 대학 다닐 무렵 평일은 쌀 배달과 주말은 연탄 배달이 우리 형제들 몫이 되고 말았습니다. 쌀과 연탄으로 자식들 공부시키기 힘든 아버지는 숙부와 같이 건축을 하셨으니 저희들이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지요.
자금력이 없는 아버지는 현장을 관리하며 공정이 이어지도록 조절을 했고, 어렵게 사는 질부들이 인사하러 오면 ‘아이들 옷이라도 입혀라’며 두둑한 봉투를 내 놓으시곤 했습니다. 신부로 재직 중인 후배는 우리 집에 세 들어 산 적이 있는데 ‘형님 집이 그렇게 부러웠다’는 말을 사제 서품을 받고 난 뒤에 하더군요. 그래도 사남매를 다 대학 보낼 형편이 못 되어 여동생들은 꿈 많던 소녀 시절, 자신의 미래를 포기해야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끼니 걱정은 하지 않았으니 그 후배는 부러워했던 가 봅니다. 그땐 그래도 인정이라는 게 남아있던 시절이었습니다. 큰 일 치르면 서로 음식도 나누어 먹고, 명절이면 일가친척이 아니라도 어른들이 계시는 댁을 찾아 인사도 드리는 등 서로를 알고 지내던 인간미가 남아 있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의 비리 종합선물세트인 개발독재
가난하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냄새와 인심과 인정을 물씬 풍기던 그곳 사람들, 덕지덕지 붙어살면서 걸핏하면 서로 악다구니를 쓰고, 욕지거리와 삿대질로 거칠게 다투면서도 저녁이면 아무네 평상에 둘러앉아 수제비와 삶은 감자를 나눠먹고, 누구네와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안녕과 희망을 얘기하던 그 사람들. 지금은 어디로 갔을까, 어디 가서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1984년 우리 동네는 강제철거를 당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서울 목동 신시가지 개발을 통해 엄청난 정치자금을 챙겼고, 대구의 경우 대봉동 일대를 대백에 통째로 넘기며 뒷돈을 챙겼습니다.
소방도로 변이라 자체 개발을 했더라면 부모님들의 노후는 아무 걱정 없었을 텐데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은 가진 것이라곤 작은 집과 가게 하나 뿐인 우리 집을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군대생활을 할 때라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이 도통 없었습니다. 복현동 아파트로 이사 가기 전 우리 식구들은 수성동에서 잠시 남의 집에 세 들어 살았습니다. 철들어 남의 집 살이 하지 않았던 가족들의 불편함은 이루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그 집에서 연탄가스가 새어 대학 다니던 동생이 경대병원 응급실로 실려가 자칫하면 큰 일 치를 뻔한 끔찍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휴가 나왔을 때 ‘다 키운 네 동생 죽일 뻔 했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그냥 치를 떨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삶의 의욕이 누구보다 높고 의지가 강한 아버지는 그 시절 옆집이 부서져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버티셨다고 합니다. 한 집이 이사 가면 바로 부셔 버려 이사 가지 않고는 못 버티게 만드는 건 예나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쥐도 끓고 도둑고양이도 설치는 곳에 버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아버지의 고집을 꺾지 못했습니다.
철거 용역인 동네 건달들도 평소 고개 숙이며 인사하던 분 앞이라 그냥 이사 간 집만 건드릴 뿐 우리 가족들에게는 어떤 짓도 하지 못할 정도로 아버지는 강단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버티다 못한 동장이 나서서 구청과 중재를 한 끝에 철거민 중 가장 많은 보상금(?)을 받고 아파트 입주권 딱지 한 장 들고 피눈물을 삼키며 이사를 했습니다. 골수 공화당원이 철거를 계기로 확 바뀌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형제들의 군사독재 정권을 향한 분노는 철거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무리 성실하게 일 해도 안 되는 세상의 구조적인 모순을 두 눈으로 보고 몸으로 직접 겪었으니 눈이 안 뒤집어 진다면 오히려 이상하지요.
남산4동의 철거 싸움에서 쟁취한 세입자 입주권
지금의 남산4동 까치아파트가 있는 동네는 예전에 전형적인 빈민가였습니다. 지금 출석하고 있는 이웃교회가 그 동네에 1986년 둥지를 틀고 공부방부터 시작해 가난한 이웃들을 섬기고 있었는데, ‘주거환경 개선사업’이라는 걸 들고 나와 철거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사람이 지나가면 서로 어깨가 부딪칠 정도로 좁은 골목에 옆집의 어지간한 소리는 다 듣기는 다닥다닥 붙은 곳이었습니다. 빈 집 몇 군데 철거를 당하다 주민들은 기독청년운동 하는 청년들과 대학생들의 지원에 힘입어 같이 끈질기게 싸웠고, 세입자들의 입주권까지 해결할 정도로 성과를 얻어 주민들이 같이 모여 잔치를 하고 헤어진 경험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대구시가 주민들의 요구를 들어준 것은 물론 아니었습니다. 시공사인 화성산업 본사가 있는 동아쇼핑을 찾아가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내리며 유인물 수 천 장을 날리는 등 기습 시위를 한 끝에 겨우 받아낸 것이었으니 치열하고 끈질긴 투쟁의 성과물인 셈이죠. 무엇보다 교회가 나가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것에 대한 부담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봅니다. 보통 교회는 철거가 시작되면 주민들 보다 보상금 두둑이 받고 먼저 빠져 나갈 궁리 밖에 하지 않는데 ‘마지막 한 사람이 남아도 싸운다’고 버티니 갑갑할 수 밖에 없었지요.
교회 내 침투한 좌경 세력을 축출한다며 이른바 ‘동해공작’이란 조작 사건을 벌인 엉터리 수사로 혼쭐이 난 경찰이 민중교회를 건드리는 것에 대해 엄청난 부담을 느끼고 있어 대구시가 무리하게 밀어 붙일 수 없었습니다. 주민들과 기독청년ㆍ대학생들이 연대해 싸워 세입자들의 주거권까지 확보한 대구 지역 최초의 구체적인 성과물이었습니다. 거리 시위를 나가면 전경 1개 중대 정도는 꼼짝 못하게 막을 정도로 강단 있는 정파 대학생들의 치열하고도 끈질긴 싸움이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술 한 잔 하며 기억을 더듬다 보면 그 시절 ‘남산동 철거 현장에서 있었다’는 당원들을 많이 봐 ‘멀리 못 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김귀정 열사 부검에 입회했던 공안검사인 선배
그 후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 활동 공간을 옮기려 고민 하던 중 생활협동조합운동에 관심을 갖고 성주로 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뉴스를 보다 어딘가 낯이 익은 얼굴의 젊은 검사가 시위대와 몸싸움 하는 걸 봤습니다. 노태우 정권의 공안칼날이 시퍼렇던 ‘강경대 치사정국’ 때 서울에서 시위대가 경찰의 토끼몰이에 몰려 좁은 골목길에 들어선 순간 누군가 앞에서 넘어졌습니다. 발길이 막힌 시위대는 도리 없이 볏짚처럼 차곡차곡 쌓이고 말았습니다. 옆에서 여학생이 비명을 질렀다고 합니다. 단말마로 울부짖던 비명이 이내 사라져 메아리가 먼저 죽고, 비명이 사라지고 이어 사람이 죽었습니다. 성균관대 김귀정이 압사사고를 당했는데 부검 입회 검사로 들어가려던 선배였습니다.
공안정국으로 몰아가던 경찰과 안기부와 정권은 한 생명의 죽음 앞에서 더 이상 어찌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습니다. 열사의 시신이 안치된 백병원 영안실은 동료학생들이 밤낮으로 철통 같이 지키고 있어 경찰 병력을 앞세워도 들어설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제 아무리 폭력적인 노태우 정권도 유족과 진상조사단의 동의 없이 시신부검을 강행할 수 없었고, 그날 현장에서 검거한 시위대를 구속하지도 못했습니다. 공포감이 극에 달한 가운데 슬프고 비통한 마음 가눌 수 없었지만 끝내 시신을 사수해 유족들의 동의 하에 진상조사단이 인정한 인의협 의사들이 입회해 부검을 실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시신을 지킨 청년학생들과 몸싸움 한 젊은 김수남 검사는 그 후 울산과 창원을 누비면서 공안통으로 노동자 탄압에 앞장 선 대가로 출세 가도를 달렸다고 들었습니다. 잠시 멈춤 하는가 싶더니 작년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 때 소비자 불매운동 억지 수사를 진두지휘한 ‘서울중앙지검 3차장’으로 화려하게 부활해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얼마 전 법무부로 전근 가 용산 참사 사고에는 개입하지 않았으니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17년 전의 일로 신군부 공안폭력통치가 극에 달한 시점이었습니다. 그때도 열사의 시신만큼은, 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만큼은 지켜야 한다는 게 법 이전의 상식이었고, 폭력정권에 남아있던 일말의 양심이었습니다.
앞산의 겨울을 몰아내는 달비골의 봄 소식
2009년 총칼이 아닌 민주적 절차에 의해 당선되었음을 자부하는 이명박 정권, 민주경찰의 기치를 내건지 10여년이 지난 대한민국 경찰, 그들이 자행하고 있는 천인공노할 살인 만행을 무엇으로 불러야 하며, 감히 무엇과 비교할 수 있으며, 가히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요? 설 연휴 온 나라가 꽁꽁 얼어붙고 쉴 새 없이 눈발이 내렸고 이 곳 달비골의 추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추위에 몸이 얼고 폭설로 도로가 막혔으나 그것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게 있습니다. 고향을 향하는 마음과 고향마을의 부모님을 그리는 자식들의 마음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소망, 가난한 이웃들과 더불어 살자고 외치는 양심의 소리,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우리들의 간절한 외침을 막을 수 있는 건 세상 어디에도 없으며, 하늘은 그럴 권리를 어느 누구에게도 주지 않았습니다. 이제 봄 소식이 이곳 앞산 달비골에도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이제 몇 일 후면 봄의 문턱이라는 입춘입니다. 엄동설한의 북풍한설이라 할지라도 오는 봄 앞에는 어찌할 수 없음을 우린 압니다. 겨우내 어딘가에서 잠들었던 뭇 생명들의 꿈틀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듯이 겨울은 봄에게 밀려갈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꽃샘추위가 봄을 시샘할지라도 앞산의 겨울은 달비골의 봄 소식에 밀려나지 않을 재간이 없음을 우린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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