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와 국제

팔레스타인 가자 공격 ‘이스라엘은 지금 자살하고 있다’

녹색세상 2009. 1. 16. 23:58
 

‘군사주의-동맹-여론 결합 전략 더 이상 통하지 않아’


‘세계체제론’의 이매뉴얼 월러스틴 미 예일대 석좌교수는 15일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공격으로 아랍권은 물론 세계적인 비난을 받게 되면서 ‘지정학적인 자살’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월러스틴 교수는 이날 미 빙햄턴대 페르낭브로델센터 홈페이지에 올린 논평문에서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 이후 마초적 군사주의, 동맹, 여론전이라는 세 가지 전략을 결합시켜 생존해 왔으나 이제 통하지 않게 됐고, 다른 전략을 쓰기도 이미 늦었기 때문에 자살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월러스틴은 마초적 군사주의에 대해 최근 에후드 올메르트 이스라엘 총리가 ‘하마스에게 철권(iron fist)을 날릴 것’이라고 말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적 열망, 그리고 그에 대한 전 세계 유대 사회의 강력한 지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 유엔 학교와 유엔 구호 차량을 공격했던 이스라엘은 급기야 15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예루살렘을 방문하던 그 시점 보란 듯이 가자지구의 유엔 팔레스타인난민기구(UNRWA) 건물을 폭격했다. 이 공격에는 백린탄이 사용됐다는 보도도 나왔다. (사진:로이터/뉴시스)


이스라엘의 동맹 전략은 소련, 프랑스, 미국과 순차적으로 맺었던 관계를 말한다. 이스라엘의 후원국이었던 이들 세 나라는 무기를 제공함으로써 군사적으로 후원했고, 외교적ㆍ정치적으로도 지원했다. 나아가 미국은 경제적 지원까지 보탰다. 세 번째 전략인 홍보(public relations)는 세계 여론을 상대로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건국 초기에는 아랍권이라는 골리앗에 맞서는 개척자 다윗의 이미지로 여론전을 폈고, 1960년대 후반부터는 2차 대전 중 나치에 희생당한 민족이라는 이미지로 유럽의 죄의식과 동정심을 유발하는 전략을 썼다. 월러스틴은 “이스라엘의 세 가지 전략은 잘 작동했고 더욱 효과적이 되어 갔으나 1980년대부터 역효과를 냈고 현재는 급격한 몰락기에 접어들었다.”며 그간의 쇠퇴 과정을 소개했다.


‘다윗에서 골리앗으로’…1967년 전쟁이 ‘터닝포인트’


1948년부터 25년 동안 이스라엘은 아랍권과 4차례의 전쟁을 치렀다. 1948~49년 1차 전쟁은 유대 국가를 세우기 위한 것으로, 국가 건설을 선언한 이스라엘에 아랍 국가들이 공격해 들어오면서 시작됐다. 이스라엘은 전쟁 초기 어려움을 겪었으나 소련의 사주를 받은 체코가 무기를 지원함으로써 유엔이 이스라엘 영역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동예루살렘 등 상당 부분의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했다. 그러나 소련은 유대 국가가 자국 내 유대인들에 미치는 영향력을 우려한 나머지 이스라엘을 버렸고, 이스라엘도 냉전 기간 동안 사회주의권과 관계를 단절하고 정치ㆍ문화적으로 서구의 일원이 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 후 북아프리카 3개 식민지에서 벌어진 독립운동과 맞닥뜨린 프랑스는 이스라엘을 유용한 동맹국으로 만들고자 군사적 지원을 했다. 프랑스는 특히 이스라엘의 핵무기 개발을 도왔고, 이스라엘은 1956년 프랑스-영국과 함께 이집트와 전쟁을 벌였다.(2차)


그러나 1962년 알제리가 독립하면서 프랑스는 이스라엘과 나눌 이해관계가 없어졌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긴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다. 1967년 6일 전쟁(3차)이 터지자 미국은 이집트와 싸우는 이스라엘에 처음으로 무기를 지원했다.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스라엘은 점령지에 정착촌을 건설하는 정책을 시작했다. 또한 전 세계 유대인들의 태도를 바꿔 놨다. 자신들의 성취에 강한 자긍심을 갖게 됐고, 이스라엘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 미국 및 서유럽에서 강력한 정치운동을 시작했다. 키부츠(집단농장)로 상징되는 개척자로서의 이스라엘이란 이미지를 버리고 홀로코스트를 강조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를 정당화하기 시작했다.

 

  ▲ 지난 3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이스라엘 규탄 시위 (사진:로이터/뉴시스)


1973년 아랍국들의 공격으로 시작된 전쟁(4차)에서 이스라엘은 미국의 무기 지원으로 승리했다. 이후 이집트와 요르단이 이스라엘을 인정하면서, 아랍국들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시대는 끝이 났다. 그 시점부터 팔레스타인에서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라는 단체가 부상했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PLO와 그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와의 협상을 거부하고 ‘철권’을 선호했다. 그러나 1987년부터 6년간 1차 인티파다(봉기)가 일어나면서 철권 정책도 한계가 드러났고, 이스라엘과 미국은 PLO와 대화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 결과 1993년 오슬로협정이 맺어졌고 점령지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세워졌다.


하지만 당시 세계 여론에 영향을 미쳤던 건 오슬로협정이 아니라 인티파다였다. 처음으로 다윗과 골리앗의 이미지가 뒤바뀌었고, 처음으로 서방측이 소위 ‘2국가 건설안’을 지지하기 시작했으며, 처음으로 이스라엘의 철권 정책에 대한 심각한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이 ‘2국가 건설안’을 진지하게 검토했다면 안정을 찾을 수 있었겠지만, 언제나 한 걸음 뒤에 있었다.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과 협상할 수 있을 때 하지 않았고, 아라파트와 협상할 수 있을 때 하지 않았다. 아라파트가 죽고 무기력한 마무드 압바스가 그 뒤를 이었을 때는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하마스가 승리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하마스와의 대화를 거부했다.


‘미국도 계속 지지할 수 없을 것’


이러한 설명에 이어 월러스틴은 하마스를 분쇄한다는 이스라엘의 이번 침공 목표는 달성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2국가 건설안은 가능할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팔레스타인과 세계의 여론은 지금 ‘1국가 건설안’으로 움직이고 있고 이것은 시오니스트 프로젝트의 종말을 뜻한다”고 스스로 답했다. 그는 이스라엘의 군사주의는 이라크에서 부시 미 대통령이 그랬듯 더 이상 성공하지 못할 것이고, 동맹국 미국도 강력한 지지를 계속 보내지 않을 것이며(I doubt it), 세계 여론도 이스라엘에게 동정적이지 않아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스라엘이 유럽의 전초기지가 아니라 중동의 일원으로 팔레스타인의 무장 조직과 협상하는 전략으로 전환하기도 매우 늦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결국 자살로 가고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프레시안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