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생태

사진과 함께 보는 앞산 ‘상수리나무 위’의 마지막 토요일 편지

녹색세상 2008. 12. 27. 18:40

 

 

 

간밤에 잠은 잘 들었는데 추워 일찍 깼습니다. 해 뜨기 직전이 가장 추운 시간대라 이 추운 동지섣달에 새벽에 움직이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죠. 5시에 일어나 밥 한 술 들고 뼈 속까지 스며드는 추위를 무릅쓰고 하루 일당을 벌려고 집을 나서는 건설노동자들이 떠오릅니다. 노가다 말로 ‘한대가리 깨러 간다’고 하지요. 진절머리 나도록 싫지만 먹고 살아야 하고, 가족들 생계 때문에 그 추위에도 불구하고 나섭니다. 이런 건설노동자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집을 짓고, 도로도 만들고 다리도 설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가다’라 부르며 사람대접을 제대로 해 주지 않습니다.


대구는 재작년 건설노조의 총 파업으로 지역의 어지간한 현장을 세운 일이 있어 그나마 조금 나아졌습니다. ‘상수리나무 위의 작은 성’을 지어준 건설형제들이 오늘도 무사히 털끝하나 다치지 않고 일과를 마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추워 몸이 잔뜩 움츠러들어 전열기를 켰더니 묵묵부답. 추운데 이거 ‘큰 일 났네’라는 걱정이 앞서 이리저리 주물러 봐도 꼼짝도 하지 않고 애를 먹입니다. 다시 침낭 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어 난감하기 그지없지요. 해 뜨기 직전의 추위라 걱정부터 앞섭니다. 30여 분 만에 작동을 시작해 일단안심을 했습니다. 

 

 

▲ 앞산 달비골 ‘나무 위 농성’은 저렇게 상수리나무에 의지해 하고 있습니다. 자연파괴를 막기 위해 자연과 하나 되어 하는 것입니다.


어젯밤 잠자리에 들기 전 연결이 안 되던 인터넷이 오늘 따라 계속 애를 먹입니다. 이래저래 하루 시작이 긴장의 연속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제 오후는 3시간의 외출 재가(?)를 받아 쏜살같이 달려갔습니다. 강추위에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감기에 대비해 주치의사인 후배를 찾아가 지금까지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새치기도 했습니다. 다른 약을 보여줬더니 ‘모르겠다’기에 다음에는 처방전을 챙겨오라고 하더군요. “이 약은 먹지 말고 감기가 왔을 때 먹어라”는 주의를 빠뜨리지 않습니다. 이래저래 처방전 남발해 제약회사로부터 뒷돈 챙기는 장돌뱅이 의사들이 많은데 ‘안 그래도 먹고 사는데 그 짓 못하겠다.’는 참 반듯한 양심 있는 의사이지요. 이런 의사들이 제 주위에는 많은 걸 보니 사람복은 타고 난 것 같습니다. 다른 곳도 들러야 하니 최대한 빨리 움직였습니다.

 

 

  ▲ 달비골로 산책오는 시민들이 많이 찾는 ‘평안동산’으로 가는 길에 아침이 밝아 옵니다.

 

사회안전망이 워낙 허술한 사회라 어디 움직이면 생돈 들여가며 보험을 챙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슨 영문인지 월요일부터 전화를 한 보험하는 후배는 연락이 안 되어 부득불 직접 가서 계약을 하고 왔습니다. (어느 회사인지는 보안입니다. ^^) 지하철로 이동 중 엘리베이터 안에서 모 국립대 이비인후과에서 열심히 연구하고, 후학들을 지도하는 후배 모친을 뵈었습니다. 연세가 있어서인지 몇 번 인사를 드렸는데도 깜박 하시더군요. ‘보험 때문에 가는 길’이라고 말씀 드렸더니 작년 친구 분들과 유럽 해외여행 갔을 때 ‘치료한 적이 있는데 한 달 후 진료비 전액이 나오더라’며 신기해 하셨습니다. “영국은 여행 중인 외국인도 무료로 진료해 주며, 북서유럽 대부분 국가는 유학생들까지 무상 진료”라고 말씀드렸더니 신기해 하셨습니다.


칠순이 넘은 연세니 먹고 살기도 어려웠던 시절에 대구의 ㄱ여고에 국립사대까지 나왔으니 대단 하죠. 서문시장에서 포목점을 하신 후배 외조모의 ‘누구든 배워야 한다’는 열성 덕분에 남매 모두가 대학을 졸업했다고 들었습니다. 의대 교수하는 큰 아들과 부친의 사업을 이어받은 둘째 아들, 외국 가서 사는 막내 아들, 미스코리아에 모델까지 한 딸을 두셨으니 해외여행 정도야 아무 것도 아니지요. 같은 연배임에도 지금까지 고생만 하고 살아오신 어머니 얼굴이 갑자기 떠올라 가슴이 메어졌습니다. 젊을 때는 정갈하기 그지없는 시어머니 모셨고, 늙어서는 손자손녀들 돌보느라 160이 넘는 키에 그 좋던 기골은 간데없고 허리가 접힌 고부랑 할머니가 되고 말았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우리 아들들이 하는 일이 맞다’며 지지를 해 준 든든하기 그지없는 후원자신데 효도 한 번 제대로 못한 죄인입니다.

 

 

 ▲ 달비골의 저수지에는 온갖 고기들이 살고 있을 정도로 물이 맑은 곳입니다. 저 멀리 해가 떠올라 달비골을 비추고 있습니다.

 

참 ‘죄인 중의 죄인’이라 어머니 앞에서 입을 뗄 수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입산한 후 한 번도 꿈을 꾸지 않았는데 복현동에 있는 본가가 어디론가 이사를 가 찾아 헤매다 깨고 말았습니다. ‘아빠 방학인데 놀러가요’라는 딸의 소리도 듣고, 아들 둘 대학 구경 시킨다고 꿈 많던 소녀시절 여상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던 여동생들로부터 원망도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묵묵히 아무 말씀없이 가만히 계셔 더욱 가슴이 메어졌습니다. 이래저래 부모 노릇도 못하고 자식 노릇 못하며 살아왔습니다. 급한 것 챙기러 나갔다가 어린 자식과 부모님 생각에 안 꾸던 꿈도 꾼 지난밤이었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형님이 믿고 하고 싶은 일 하시라’며 늘 응원해 주는 동생이 있어 힘을 냅니다. 오늘 하루의 시작이 너무 감상적이라 차분히 사색을 하는 날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