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디 있는지, 있어야 할 곳에 있는지 가끔 생각해 보는 마음의 여유를 지녔으면 좋겠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는 물음은 구약 성서의 창조설화에 나오는 것으로 하느님이 아담에게 하는 질문입니다.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남에게 핑계를 대고 숨기까지 하는 비열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는 대목이죠. ‘서 있는 이 곳’이 정말 내가 있어야 할 곳이 맞는지 수시로 질문을 던져 봅니다. 지천명(知天命)의 언덕을 바라보면서까지 와 있으니 너무 당연하고 자명한 것으로 인정하는 순간 독선과 아집에 빠질 우려가 많은 게 우리 인간의 한계이죠. 한계는 끊임없는 노력과 자기 성찰을 통해 극복해 나가는 것이지 그냥 덮어두면 자꾸만 엉뚱한 것이 쌓이기 마련이죠. 상처를 치료하지 않고 덮어두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인생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라 걸음을 멈추는 순간 정체가 아니라 퇴보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식들의 부모로서 있어야 할 곳에 있는지,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제 자리에 있는지 한 번 쯤은 되돌아보면서 살아가면 어떨까 싶습니다. 학교 갔다 오면 파김치가 되어 있는 자식을 보면서 과연 자식을 위해 자식이 좋아하는 것을 시키는지, 아니면 남들이 다하니 억지로 시키는 것은 아닌지, 내 체면과 대리만족 때문에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도 해 보고요. 어찌된 영문인지 우리나라는 ‘난 남들과 특별하다’는 이상한 궤변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고민하는 경제학을 비롯한 대부분의 인문사회학은 ‘특별해’ 보다는 ‘일반적인 견해’를 더 높이 평가합니다. 이런 것을 ‘보편타당적인 논리’라고 하죠. 복지가 발달한 사회일수록 ‘특별한 논리’ 보다는 보편타당한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 머리를 싸매고 있습니다. 자식이기는 부모 없고 자식 가진 죄인이기에 큰 소리 칠 수 없는 게 분명하지만 일반성을 벗어난 것을 대한 집찰을 버리는 게 좋다고 봅니다.
우리사회는 1997년 불어 닥친 외환위기 이후 중산층이라는 ‘중간계층’이 무너진지 이미 오래입니다. 10:90의 사회를 벗어나 상위 4~5퍼센트의 사회로 사람을 몰아 붙여 무한경쟁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상위 집단에 들어가는 게 분명히 제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것 없는 것 다 털어가며 경쟁을 하지만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니 경쟁은 불가피하지만 최소한의 공정한 규칙을 정하고 경쟁을 하고, 경쟁에서 쳐진 사람들을 안고 가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아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을 돌아볼 줄 알고, 배운 사람은 못 배운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 게 인간이 지녀야 할 기본예의라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야, 넌 맨 날 꿈같은 소리만 하느냐”고 할지 모르나 우리가 아는 복지 국가는 불필요하게 기운을 빼지 않도록 사회 구조를 이렇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지금 너는 어디 있느냐’는 물음에 당당하게 답은 못할지라도 최소한의 응답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경쟁에서 내가 이겼다고 패배자를 외면할 때 그 자리가 오래갈 수 있겠습니까? 비록 공정한 경쟁이라 할지라도 쳐진 사람의 손을 잡아줄 줄 아는 자리에 우리가 서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나라 자살자는 하루 평균 37명이고 태어나는 새 명은 0.176명인 아주 기형적인 사회입니다. 40대 남성 사망률은 부동의 세계 1위라 그 자리를 빼앗겨 본 적이 없습니다. 그로 인한 사회적인 비용 손실은 엄청남에도 불구하고 대책은 외면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급증하는 이혼 사유도 경제적인 문제가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게 연구 결과입니다.
잠시 눈을 돌려 주위를 살펴봅시다. 이혼하지 않은 사람이나 자살하거나 40대에 돌연사 하지 않은 친인척이 없는지를.... 그 중심에 우리가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난 특별해서 저들과 다르다’며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내 자식이 무슨 짓을 해도 일류대학만 가면 되지 다른 것은 필요 없다.”고 하지는 않았는지 잠시만이라도 되돌아봅시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보고도 먹고 살기 바빠 외면한다면 그 무관심과 외면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야 말 것입니다. 문자 한 번 쓰려합니다.
“난 공산당이 아니라 공산당을 죽일 때 가만 있었다. 노동조합원이 아니기에 노조를 파괴할 때도 가만있었다. 천주교를 핍박할 때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 외면했다. 마지막으로 개신교를 탄압할 때 주위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는 이 말은 히틀러 치하의 한 신학자의 고백입니다. 내가 서 있는 곳이 분명 기쁨과 함께 슬픔이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좋은 것만 받아들인다면 내가 힘 들 때 주위에 과연 누가 있을지 함께 고민해 봤으면 합니다.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고 절대자가 물을 때 뭐라고 답할 수 있을지 고민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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