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 폭탄 키운 정부…다시 고개 든 ‘강만수 퇴진론’
“정부를 믿지 못하는 것이죠. 어제와 그저께 상황은 한 마디로 정부에 대한 불신을 넘어섰다고 봐야지. 누구는 ‘시장의 반란’이라고 하던데…(웃음)”
9월3일 아침 일찍 한 대형증권사 고위 임원과 나눈 이야기다. 최근 국내 금융시장이 대혼란에 빠진 것을 두고, 그의 대체적인 분석은 다른 전문가들과 다르지 않았다. 9월위기설에 대해서도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고 했다. 문제는 신뢰의 위기에 따른 불안감의 증폭이라는 것이다. 정부 경제정책에 대해 시장이 신뢰를 상실한 상태에서, 투자자들의 불안감이 날로 커지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특히 최근 외환시장의 불안정성은 정부 스스로가 키웠다는 점을 강조했다. 환율정책이 오락가락하면서 일관성을 잃어버렸고, 정부의 뒷북치는 위기 대응 속에 투기 세력만 배를 불렸다는 지적이다. 이 과정에서 외국투자자들 사이에선 한국 금융시장에 대한 전망이 극히 불투명해지기 시작했고, ‘9월 대란설’이 단순히 ‘설(說)’로 끝나지 않고 현실로 되는 것 아니냐는 분위기가 확산되는 것 이다.
하루 빨리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선 정부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고환율 정책으로 인한 물가폭등과 외환시장 개입 실패에 대한 책임론이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 퇴진론이 다시 불거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부에 대한 시장의 불신은 생각했던 것 이상이다. 국내 주요 금융권 애널리스트 뿐 아니라, 외국계 투자기관 쪽도 마찬가지다. 국내 증권사의 한 애널리스트는 “지난 6개월 동안 정부 경제정책 기조를 살펴보면, 어디서 신뢰의 위기가 나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며 “고유가 등 대외적인 상황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유독 한국만 환율이 폭등하고, 금융시장 불안이 커진 것은 당국의 정책 실패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오석태 한국시티은행 이코노미스트는 그동안 정부의 고환율 정책에 대한 우려를 강하게 제기해 온 전문가. 그는 “정권 초창기에 이 같은 고환율 정책을 쓰면 국내 물가가 오르고 서민ㆍ중산층이 직격탄을 맞게 돼 있다”면서 “내수침체에 따른 경기하강이 가속화되고, 금융시장 불안이 가중되면서 한국경제의 불안정성이 커진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지난 2005년 이후 정부가 고환율 정책을 포기하면서, 내수시장이 살아났던 점을 되짚어 봐야 할 것”이라는 충고도 했다.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정부가 뒤늦게 물가에 초점을 맞춘 민생안정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실제 진행되는 정책의 내용들을 보면 여전히 성장 중심의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금융 시장에선 이미 정부의 상황 인식이나 대응 능력이 크게 떨어져, 신뢰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는 곧 금융시장의 불안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 원-달러 환율은 현 정부 출범이후 6개월 만에 200원이나 폭등했다.
경제는 비명 지르는데, 왜 차관이 옷 벗나
대표적으로 꼽는 것이 외환시장. 정부의 환율정책은 말 그대로 ‘오락가락’이다. 시중은행의 한 외환딜러는 최근 사석에서 “환율정책은 다른 어떤 금융정책보다 신중하게 접근해야한다는 것은 세계 모든 정책당국이 알고 있는 사실”이라며 “지난 6개월 동안 우리의 환율은 마치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았다.”고 토로했다. 실제 이명박 정부 출범당시 ‘원-달러 환율’은 950원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3일엔 1150원을 돌파했다. 6개월 새 무려 달러 당 200원이나 올랐다. 그만큼 원화가치는 폭락한 것이다. 경제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고환율은 치솟는 물가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수입 물가를 자극했고, 차례로 생산자물가·소비자물가 폭등으로 이어졌다. 중소기업들도 이 같은 고환율 정책의 직격탄을 맞았다.
‘고환율 정책에 따른 물가폭등’의 책임론이 거세지자, 청와대는 지난 7월 최중경 당시 기획재정부 차관을 경질했다. 하지만 곧장 ‘대리경질ㆍ희생양’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환율정책과 경제난국의 책임을 장관이 아닌 차관에게 물은 것 자체가 이례적이기 때문이다. 이후 정부의 태도는 돌변했다. “물가잡기 위해 외환보유고를 털어서라도 환율을 잡겠다”고 나선 것이다. “물가 잡기위해 환율 정책을 동원하지 않는다”는 기존 입장을 뒤집은 것. 두 달여 동안 정부는 200억 달러가 넘는 돈을 시장에 무차별적으로 쏟아 부었고, 환율은 한때 1000원대까지 하락했다. 하지만 효과는 한 달이 채 가지 않았다. 8월 들어 환율은 다시 오르기 시작했고, 정부의 시장 개입은 크게 누그러졌다. 일부에선 정부가 환율상승을 사실상 용인하면서, 다시 성장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 환율상승에 따른 물가폭등으로 가계 소비가 크게 위축되고 있다. 또 과도한 가계부채의 부실 가능성도 경제위기의 한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한국경제의 진짜 악재는 강만수 리스크?
국가 경제운용의 중요한 틀인 거시경제정책 방향이 말 그대로 오락가락한 셈이다. ‘고환율 중심의 성장→물가잡기를 통한 민생 안정→고환율 묵인아래 다시 성장기조’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외환시장은 극도로 불안정해졌고, 외국인 투자자들의 한국시장 탈출이 이어졌다. 실제 최근 두 달 사이 국내 주식시장 등에서 빠져나간 돈만 15조원에 달한다. 물가는 여전히 고공행진을 보이고 있고, 소비 위축과 고용부진 심화 등으로 한국경제는 사실상 스태그플레이션에 접어들었다는 평가다. 게다가 정부의 잇따른 환율정책 실패로 인해 외환보유고가 급격히 줄어들고, 이는 금융시장의 불안에 속도를 붙였다. 또 이른바 9월 위기설까지 겹치면서 금융시장 전반에 걸친 대혼란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금융시장에선 ‘추석 이전 외국인의 대규모 자금유출’이라는 드러난 악재보다는 보이지 않는 악재가 더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달러 유동성 부족 논란 외에 급격히 늘고 있는 가계부채와 부동산 버블 붕괴 가능성, 덧붙여 정책당국에 대한 불신 등이 총체적으로 어우러져 있다는 것이다. 전성인 홍익대(경제학) 교수는 “외환 보유고는 유사시에 쓰도록 가지고 있는 돈”이라며 “외환보유고가 얼마 남았느냐고 따지는 순간부터 이미 위기 가능성은 시작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 교수는 “정부의 근시안적인 환율정책으로 시장과 경제만 멍들었다”면서 “현재의 강만수 경제팀으로는 더 이상 외환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필상 고려대 교수도 “우리 경제가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는 능력은 줄고 있는 대신에 국내의 달러는 계속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다”면서 “내부적으로 가계의 과도한 부채와 기업의 부도 위험성도 커지면서 외환위기를 겪을 수 있는 구조로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환율정책 등에서 우왕좌왕하면서, “경제주체들의 신뢰를 잃어버린 것도 현재 위기의 큰 원인”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루빨리 정책의 신뢰를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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