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와 국제

‘이명박 실용주의’에 남북 관계 풀 열쇠 있다.

녹색세상 2008. 9. 3. 11:41
 

“따뜻하면 (북한이) 옷을 벗어야 하는데 옷을 벗지는 않고 옷을 벗기려는 사람(남한)이 옷을 벗었다.”


9월 1일 한 일간지가 주최한 포럼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햇볕정책에 대한 질문을 받자 답한 대목이다. 지난 10년간 남북관계에 대한 그의 인식을 정확히 엿볼 수 있는 발언이다. 정권이 바뀌고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남북관계를 애정 있게 지켜보던 많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우려와 기대가 교차하였다. 보수적 기반을 가진 이명박 정부가 지난 정부의 성과를 무시하고 남북관계를 경색시킬 여러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와 함께, 건설회사 경영자 출신의 당선인이 한반도 경제공동체에 대한 나름의 비전과 계획을 가지고 통 크게 헤쳐 나갈 것이라는 조심스런 기대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북한 정권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출범 초기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자제하고 대통령 후보 시절의 공약이 정책으로 현실화하는 시점을 기다렸던 것으로 보인다. 후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북한은 대통령 취임식에 국가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방한도 고려했던 것으로 보면 말이다.

 

▲남북 정상회담 첫날인 2007년 10월2일 평양 4·25 문화회관 앞에서 두 정상이 첫 인사를 나눴다.

 

MB 정부와 엇나간 남북관계


그러나 합참의장의 북한 선제타격 발언과 통일부 장관의 지난 10년에 대한 반성적 회고와 핵 문제 해결 없인 개성공단의 진전 없다는 강경한 메시지는 북한 정권에 부정적 신호를 주고 말았다. 북한은 모든 대남 기관 및 언론을 통해 이명박 대통령이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에 대한 입장을 밝힐 것을 요구하였고, 우리 정부는 남북기본합의서를 포함한 남북 간 모든 합의에 대해 만나서 다시 의논하자는 입장을 밝혔다. 그런 가운데 우리 정부는 전임 정부에서 주기로 약속했던 옥수수 5만 톤의 지원을 유보하였고, 인도적 지원으로 매년 진행되어왔던 비료와 식량 지원을 중단해 버렸다. 북한이 먼저 요구하면 검토하겠다는 면피성 발언과 함께 말이다. 정부 당국의 관계가 경색되면서 이미 합의되었던 각종 남북회담이 취소되었고,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남과 북 선수단을 공동 응원하기 위한 응원단 구성과 백두산 관광 등 사회문화 분야의 교류도 줄지어 취소되었다.


이런 와중에 금강산에서는 남측의 관광객에 대한 총격 사건이 발생하면서 남북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남북 당국은 금강산 관광객 사망 사건에 대해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며 현재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으며, 지칠 대로 지쳐 있는 남북관계에 의뭉스러운 탈북자 원정화 간첩 사건이 또 한 번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있다. 수사 당국은 이번 기회에 국정원의 대공 수사 역량 강화, 군대내 좌익 세력 척결 등을 공언하며 조직 정비에 착수하는 기민함을 보였고, 수구언론은 지난 10년간 느슨해진 우리 사회의 안보 불감증을 탓하며 전 국민들이 경각심을 갖고 긴장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이명박 정부는 남북관계 개선이 더디더라도 불리할 것이 없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촛불정국은 어청수 경찰청장의 철통방어(?)로 한풀 꺾였다고 자평하고 있으며, 베이징 올림픽을 계기로 지지율 반등에 성공했다는 판단을 한 이명박 정부는 거여 공룡을 동원하여 수구 일변도의 가치를 확산하는 각종 정책을 하반기에 마구 쏟아 내며 강공 일변도의 정책을 예고하고 있다. 이럴 때 자신의 전통적 지지층의 분열을 가져올 수 있는 남북관계 개선에 큰 힘을 쏟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터이다.

 

▲북핵 6자회담 5차 3단계 회의가 오는 2004년 2월 8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리는 가운데, 3일 밤 서울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코리아 소사이어티 50주년 기념 만찬에 참석한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환담하고 있다. (사진:오마이뉴스)

 

빨간불 켜진 북미관계


잘 될 것 같았던 6자회담과 북미관계 개선 속도에 빨간 신호가 켜졌다. 지난 6월 핵 불능화를 위한 신고서를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에 제출한 북한은 영변 원자로의 냉각탑을 전 세계인들이 보는 앞에서 폭파함으로써 북미관계 개선의 의지를 공표하였다. 테러지원국 해제 문제의 장애물이었던 일본의 납북자 문제 처리에 대해서도 성의를 보이며 이번 기회에 반드시 ‘테러지원국 해제’라는 미국의 관계 개선 신호를 확인하겠다는 것이 북한의 의도였다. 그러나 핵 불능화에는 ‘검증’도 포함된다는 합의되지 않은 논리를 찾아낸 미국은 북한에 핵 검증 의정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한다. 물론 의정서에는 북한이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즉 미국이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북한의 전 지역에 대한 ‘불시사찰’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히 북한은 반발했다. 북한은 8월 26일자 외무성 대변인 성명을 통해 핵검증은 다음 단계에서 참가국 전체에 지워진 의무임을 강조하며, 핵불능화 조치의 중단과 영변 원자로 복구 고려를 발표했다. 그렇다면 도저히 북한이 받을 수 없는 제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미 외교팀은 왜 이런 주장을 내놓고 있는 것일까? 이는 풀리지 않을 것 같았던 이란과의 관계 개선 조짐과 미 대선에서 공화당의 대북외교 전략이 맞물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북한과 미국이 적절한 타협점을 찾지 못한다면 6자회담은 현시점에서 단 한 발자국도 진전되지 못한 채 부시 행정부의 임기 종료 이후 다시 밑그림을 그려야 하는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물론 미국인들의 선택이 오바마냐 매케인이냐에 따라 약간의 시간차는 존재하겠지만 말이다.


다자관계 트는 북한, MB 정부는 소외


2012년을 강성대국의 문을 여는 해로 거창하게 선포한 북한은 도시 현대화 사업을 시작으로 2008년을 바쁘게 보내고 있다. 특히 공화국 창건 60주년을 맞이하여 9월 9일 100만이 참여하는 열병식을 준비하며 대외에 존재감을 과시하려고 한다. 북한은 국제사회와 교류하고 연대하기 위한 기본 조건인 북미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다. 하지만, 자존심에 상처를 내면서까지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것이 북한 지도부의 생각인 것 같다. 남북관계가 막히면서 그동안 남북관계에 관여했던 정책, 실무 담당자들에 대한 내부 검열 작업도 고강도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언론을 통해, 혹은 남북관계 현장에서 자주 접촉했던 북한 사람들이 철직(‘직위해제’의 북한식 표현) 당했다는 소식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한편, 중국과 동남아, 중동, 유럽 등지에서 국제사회와 시범적인 교류를 하기 위해 북한 무역 일꾼들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북미관계 개선의 분위기를 간파한 중국계 자본, 유럽계와 중동계 자본이 북한을 주시하며 움직이고 있는 것은 북한과 국제사회와의 소통이 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라선(나진ㆍ선봉 지역)을 중심으로 한 북한과 러시아의 긴밀한 협력 관계는 한반도 종단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대륙진출에 대한 원대한 구상을 가지고 있는 우리로서는 부러운 대목이다.


후쿠다 총리의 실각으로 잠시 멈칫하겠지만 북일 관계가 개선되면 펼쳐지게 될 북일 경제협력 문제도 현재 경색된 남북관계 상황을 안타깝게 한다. 남북관계가 계속 막혀 있는 와중에 북일 관계가 개선돼 일본 자본이 투입되어 개성-신의주 철도, 고속도로 등을 건설하게 된다면 그 여파가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굉장히 심각할 것이다. 중국 등지에서 북한과 일본 관리들이 비공개 회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는 소식통들의 전언이 반갑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반도 문제 풀어갈 MB 정부의 실용적 선택은?


이명박 대통령이 햇볕정책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피력했던 지난 1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조용한 충고를 전했다. 1일 발간된 격월간지 ’민족화해’ 최신호에 실린 민족화해협의회 10주년 특별대담에서 “동북아 안보체제와 통일문제를 다룰 때 남한과 북한, 미국의 3자 협력체제가 잘 돼야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전제 아래 “정부 정책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전 정권에서 한 것을 다음 정권에서 인정하지 않는다면 누가 우리나라를 신임하겠는가?”라며 “정체된 남북관계를 풀고 더 좋은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남북정상회담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제3의 합의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굳이 DJ의 충고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명박 정부가 “상생과 공영”을 대북정책의 기본 목표로 설정했다면 한반도를 둘러싼 현재의 여러 가지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정권과 이념에 구애 받지 않고 남북관계를 발전시켜 한반도 경제공동체를 만드는 것. 바로 이것이 이명박 정부가 추구하는 실용정신과도 부합되는 게 아닐까? (새사연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