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정당들과 사회단체 연대…투표 통해 집권
파라과이 대선이 지난 4월 20일에 있었다. 텔레수르 보도에 의하면 전직 가톨릭 주교이자 좌파 정당연합인 ‘변화를 위한 애국 연합’ 대표인 페르난도 루고 후보가 40.82%의 득표를 얻어 30.72%에 그친 여당의 여성 후보 블랑까 오벨라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투표율은 65%였다. 페르난도 루고는 당선 인사 첫 마디에서 “이제부터 파라과이 정치에서 연고주의(부정부패)를 거부할 것이다. 한 시대가 마감되었으며 이제 파라과이를 변혁시킬 사명을 가진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선포했다.
파라과이는 남미에서 전형적으로 가난하고 작은 나라이다. 하지만 실제로 가보면 국토에 비해 인구가 적어 광활한 느낌을 갖게 한다. 우리에게도 이민을 통해 많이 알려진 나라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선진화가 하나도 되지 못한 나라다. 이 나라에도 좌파 정부가 들어서게 되어 남미 정치 지형의 변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것이다. 무엇보다 파라과이의 역사를 조금 알게 되면 현재의 파라과이의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 변화와 희망을 그들에게 주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이번 대선은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여러 가지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그 같은 의미를 비록 짧은 글이지만 파라과이의 역사와 접속시키면서 독자들에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 대통령 당선 후 지지자 환호에 답하고 있는 루고 대통령(조끼 입은 사람)
첫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파라과이는 지금까지 장장 61년간이나 꼴로라도 당(Partido Colorado)이 집권해왔는데 이제 평화적으로 정권 교체가 이뤄진 것이다. 소위 민주화가 이룩된 것이다. 이 정당은 예전에는 외세 추종의 극우 독재 정당으로 90년대 이후에는 우파 자유주의 정당으로 권력을 잡아왔다. 그런데 절차적 민주주의가 진행되면서 선거를 통해 좌파 후보가 당선되었다는 것은 비록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절차적 민주주의를 지키는 게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또한 독재체제에서 갑작스럽게 민주주의로 정치 지형이 이동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9개 좌파정당과 20여개 사회단체의 연대
1989년에 독재자가 쿠테타로 실각한 후, 권력을 잡은 실력자는 왼쪽으로 한 걸음 이동하면서 정치적 자유를 허용하게 된다. 그 후 90년대 중반에 신자유주의 정책의 수행으로 파라과이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을 맞은 후 2003년에 집권한 니카노르 두아르테 대통령은 중남미 좌파정부들과도 가깝게 지낼 만큼 더 왼쪽으로 정치 지형을 옮겨 놓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특이한 것은 평소에 난립해있던 9개의 좌파 정당들과 약 20개 이상의 사회운동 단체들이 총연합 하여 내세운 후보가 ‘페르난도 루고’였다는 점이다. 우리와는 정치 지형과 역사적 맥락이 다르지만 우리로 하여금 한 번쯤 생각해보게 만드는 흐름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 대의민주주의의 핵심이며 동시에 취약점이기도 한 정당체제에만 정치 변화를 기대지 않은 것이다. 크고 작은 사회적 소수자 운동 단체들(동네 자치위원회를 포함한)이 변화를 견인한 것이다.
이 점은 페르난도 루고도 강조하고 있다. 그는 2006년에 파라과이의 가장 가난한 지역의 다양한 풀뿌리 사회단체들에 소수 좌파 정당을 합친 ‘시민 저항’이란 운동 단체를 이끌면서 시민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꼴로라도 당을 대표하는 사람은 알프레도 쉬트로센너라는 장군인데, 그는 1954년에 쿠테타를 통해 집권한 이후 파라과이를 무려 35년간 독재로 다스리며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적 퇴보를 경험하게 한다. 그는 1989년에 다른 장군에 의한 쿠테타로 실각한다. 새로운 장군은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중도 개혁 정치를 통해 파라과이를 안정시킨다. 쉬트로센너의 통치기간 동안 엄청난 인권 탄압과 공포정치가 있었을 것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페르난도 루고를 그 같은 독재의 희생자들의 가족들과 가난한 농민들이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다.
해방 신학 지지하는 전직 주교
둘째로, 해방신학을 지지하는 전직 가톨릭 주교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초유의 일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종속이론, 해방신학 등은 시대가 흘러가면서 한 물 갔다는 인식이 흔한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멕시코 주간지 ‘쁘로세소’ 최근호에 의하면, 페르난도 루고는 정치 활동을 위해 2006년 12월 맡고 있던 산 뻬드로 교구의 주교직을 떠났는데 2007년 1월 교황청에 의해 성사 집행이 정지되었다고 한다. 추상적인 구호로서 ‘사회정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원주민들과 농지 없는 농민 등 가난한 사람들의 실질적 삶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일 때문에 가톨릭 주교가 성직자의 옷을 벗고 정치에 뛰어든 것이다.
브라질의 사회학자인 에미르 사데르가 분석한 새 정부의 구체적인 정책 비전은 다음과 같다. 농민과 원주민들에게 농지를 배분하겠다, 사회적 공공성 사업과 공공 인프라 토목사업을 통해 고용을 창출하겠다, 65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연금을 지급하겠다, 중소기업에 신용을 공급해 고용을 확대 하겠다 등의 내용이다. 이와 “함께 공공 주택을 신축하겠다, 신규 교사를 대폭 임용하겠다, 교육의 질을 높이겠다, 학술ㆍ문화 부문에 지원하겠다, 1단계 공공의료를 위해 간호사를 대폭 고용하겠다, 무상의료를 위해 약품을 구입하겠다”는 내용 등이 포함돼 있다.
남미 최고 경제 문화국이었던 파라과이
셋째로, 약 140년 전에 파라과이를 상대로 남미의 준제국주의 국가들(아르헨티나, 브라질)과 우루과이가 한 편이 되어 벌인 전쟁이 있었다. 이 ‘삼국동맹전쟁’(1865-1870)의 패전으로 겪은 엄청난 상처와 좌절을 극복할 수 있는 자존감을 파라과이 국민들이 이제 갖게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승자들의 뒤에는 영국이 있었다. 전쟁의 맥락에 대해 자세한 언급을 할 수는 없지만, 영국의 영향력이 큰 부에노스아이레스와 갈등이 컸고, 혼자 독불장군처럼 그 당시 세계 체제에의 편입을 거부한 데 대한 응징으로 해석된다. 파라과이는 이 패전으로 인해 국토의 상당부분을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에 뺏겼다. 아름답고 웅장한 스케일의 이과수 폭포도 브라질이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15세 이상의 남자의 90%가 전사하였다고 한다. 그야말로 망하기 일보직전의 상태에 이르렀던 것 같다.
최근에 와서 우리는 세계사를 다시 뒤집어 보는 담론을 많이 대하게 된다. 승자에 의해 쓰인 역사가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것은 흔하다.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지만, 19세기에 파라과이는 남미 최고의 경제, 문화 수준을 자랑하는 선진국이었다. 중요한 것은 외국의 경제 침략을 막기 위해 철저하게 폐쇄적이고 자급자족적인 경제체제를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이 당시 파라과이의 집권자인 호세 가스파르 로드리게스 데 프란시아 박사는 1813년부터 1840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종신 권력을 휘두른 독재자였다. 그를 소재로 하여 파라과이의 대표적 소설가인 아우구스토 로아 바스또스는 ‘나 최고’라는 소설을 쓰기도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최고, 지존의 총통’으로 불리는 호칭을 가지고 있었지만 극우 정치를 행한 것이 아니라 대농장은 몰수하고 가난한 농민을 우대하는 좌파 정치를 펼쳤다는 점이다. 특히 그 당시 세계 최강인 영국의 영향력을 막기 위해 쇄국정치를 펼치며 농업과 축산업, 공업을 발전시켰다고 한다. 그의 사후 조카가 권력을 이어받아 이렇게 독특한 민족주의적 정치, 경제체제를 유지하였다. 중남미 최초의 철도ㆍ전신ㆍ제철소, 배 등이 모두 이 시기의 파라과이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자급자족 체제라고 해서 무역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보호무역을 중시하고 자유무역을 배제했던 것이다. 담배, 마테차, 면화 등이 유럽 등에 수출하는 주 품목이었다. 파라과이가 어느 정도로 경제 사회 수준이 높았느냐 하면, 실업자가 없었고 초등학교에서는 완벽하게 무료로 의무교육을 시행하여 거의 모든 어린이들이 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원주민 과라니족의 힘
넷째로, 파라과이의 변혁에 사회, 문화적 정체성의 뿌리가 되는 과라니족이라는 원주민 문화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파라과이는 남미 윗쪽에서 급진적 체제 변화를 실험하고 있는 에콰도르, 볼리비아 등과 같이 원주민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점에서 생태적, 상호 문화적 상응성이 있기 때문이다. 파라과이에서는 스페인어와 함께 구어인 과라니어가 공용어이다. 예전에 영화 ‘미션’에 나왔던 지역이 바로 파라과이인데, 이 지역은 과거 스페인 식민시대에 예수회가 통치하는 독립지역으로서 언어가 과라니어로 통일되어 있었다고 한다. 전에는 필자도 어느 남미 나라의 사회 통계에서 문맹자가 많은 것을 보며 참 안 되었다는 생각을 가진 적이 있었다. 이젠 그 문맹자들의 주류를 이루는 원주민과 가난한 농민들이 남미 변혁의 역동성을 이끄는 주역인 것을 보게 되면서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무식한 것이 아니었다. 시장 만능, 투기 만능의 신자유주의의 거센 쓰나미를 막는 방파제였다. (부산외대/안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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