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에게 남아있는 것은 ‘토지’에 나오는 인물 같은 평사리 마을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주머니, 그리고 아저씨들의 소박하고 따뜻한 인간의 향기뿐 아무것도 없다. 충격과 감동, 서러움은 뜬구름 같이,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같이 사라져버렸다. 다만 죄스러움이 가끔 마른 침 삼키듯 마음 바닥에 떨어지곤 한다. 필시 관광용이 될 최참판 댁 때문인데 또 하나, 지리산에 누를 끼친 것이나 아닐까. 지리산의 수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먹고 살만한 사람들에 의해 산은 신음하고 상처투성이다. 어디 지리산뿐 일까마는 산짐승들이 숨어서 쉬어볼 만한 곳도 마땅치 않고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식물, 떠나버린 생명들, 바위를 타고 흐르던 생명수는 썩어가고 있다 한다. 도시 인간들이 이룩한 것이 무엇일까? 백팔번뇌, 끝이 없구나. 세사(世事) 한 귀퉁이에 비루한 마음 걸어놓고 훨훨 껍데기 벗어던지며 떠나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럽다. 소멸의 시기는 눈앞으로 다가오는데 삶의 의미는 멀고도 멀어 너무나 아득하다.” - ‘토지’의 서문 몇 토막
한국 문학의 거목이 세상을 떠났다. 한국 문학을 일구었던 토지가 무너졌다. 지난달 4일 뇌졸중과 지병 악화로 서울 아산병원에 입원, 인공호흡기에 목숨을 매단 채 중환자실과 집중치료실을 오가며 치료를 받고 있었던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이 5일 뇌졸중 등 합병증으로 결국 별세했다. 향년 82세. 고 박경리 선생은 그동안 고혈압과 당뇨 등 지병을 안고 지내오다 지난해 7월 폐암에 걸렸다. 하지만 고인은 토지의 작가답게 여러 가지 지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원주에서 흙과 더불어 살았다. 흙이 모여 있는 곳이 토지요, 토지가 있는 곳이 곧 선생의 모든 것이 살아 숨 쉬고 있는 생명의 공간이었다. 우리 민족의 ‘토지’로 남아 우리 곁을 영원히 지킬 것만 같았던 박경리 선생이 이 세상을 훌쩍 떠나버렸다. 이미 예견되었던 일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막상 떠나고 보니 서운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유언에 따라 고향 통영에서 영원히 잠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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