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민중

힘들었던 겨울 지나 다시 투쟁 시작하는 KTX승무원

녹색세상 2008. 4. 22. 19:50

 

 

 

오미선 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 지부장 직무대행


곱게 틀어 올린 머리에 말끔한 승무원 제복 차림으로 어색한 팔뚝질을 시작한 것이 2006년 초. 그 해 3월 1일 파업에 돌입, 곧이어 집단적으로 해고되고 난 후 곳곳에서의 점거농성과 견결한 파업 대오의 유지는 노동계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의 놀라움과 지지를 불렀고, 외주화 철회와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거대 공기업 한국철도공사를 상대로 싸운 KTX승무원들의 투쟁은 대표적인 ‘비정규직 문’'로 2년 내내 한국 사회에 두루 회자됐다. 어느덧 3년째, 5월 초면 투쟁 800일을 맞이하는 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의 오미선 지부장(직무대행)을 서울 용산역 부근 철도노조 서울지방본부에서 만났다. 사실 요즈음의 비정규직 투쟁을 이야기할 때, 어느 순간부터 KTX승무원들에 관한 것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지난해 말, '합의서 이행'을 요구하며 서울역 광장에서 천막농성을 벌인 이후론 소식이 잠잠하기도 했다. 장고 끝에 ‘직접고용’ 대신 ‘역무 계약직’을 받아들였고 대통령 선거를 의식하는 철도공사 탓에 조용히 기다렸지만 대선이 끝나자 잠정합의서조차 휴지조각이 됐다.


고심 끝에 선택한 ‘역무 계약직’조차 좌절


오미선 지부장은 “어느 역으로 배치가 될지, 어떤 교육을 받아야 하고 어떤 절차가 필요한지, 임금은 어떻게 되는지 같은 구체적인 교섭을 하고 있었고 대선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는데, 이철 사장이 사퇴하면서 결정 단위가 없어져 버렸어요.”라고 말했다. 이제야 일할 수 있게 됐다는 그 희망이 사라진 후, KTX지부 조합원들은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승무원으로 직접고용’을 포기한 순간부터 계약직 대안도 좌초되고 나니 새마을호 승무원을 합쳐 70여 명의 조합원만이 남았다. 장기투쟁의 피로도, 젊은 나이의 현실적인 고민들도 있었을 터. 직접고용을 포기하고 역무 계약직을 선택했을 때 “이제 와서 왜 역무 계약직을 받아야 하느냐”는 조합원 내부의 혼란도 있었지만 연대 세력이나 다른 노조의 안타까움도 있었다. ‘지금까지 싸운 게 아깝지 않냐’는 사람부터 ‘이제 그만 됐으니 투쟁을 접자’는 사람까지 다 있었다.


“투쟁을 접는 건 사실 쉬워요. 우린 이만큼 파업의 정당성을 외쳤고 법원에서 우리 손을 들어주는 판결도 나왔으니 정리하겠다, 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았죠. 계약직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건 그만큼 현실적으로 힘들었다는 걸로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오히려 장기투쟁사업장 분들은 그 결정을 안타깝게는 생각하지만 그걸로 패배의식을 느끼거나 원망하거나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한 고비를 지나온 KTX열차승무지부는 다시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투쟁의 본질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분명히 처음부터 계약직이 되려고 2년 넘게 투쟁한 것은 아니었다. 지지하고 연대해 주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바라볼지를 고민하지 않게 총회를 열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어떻게 투쟁할지도 모르겠고 공황상태에 빠져 있다가 총회에서 결정을 내렸죠. 역 계약직은 안 된다. 우리가 원래 주장하던 ‘승무원 직접고용’을 걸고 투쟁하는 게 맞다고. 직접고용을 걸고 투쟁해야 투쟁할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이 생길 거라고. 조합원들과 허심탄회하게 얘기하고 나니까 오히려 투쟁동력도 살아나는 것 같고 더 열심히 해보겠다는 의지도 생깁니다.”라고 말하는 오미선 지부장의 표정이 홀가분해 보인다. 최근에 철도공사의 사용자성을 인정한 고등법원의 판결도 호재다. 서울고등법원은 지난 8일 장문의 판결문에서 승무원들에 대한 공사의 교육과 업무지시 관계, 자회사의 부적합성 등 세세하게 KTX승무원들의 주장을 입증해 줬다. ‘불법파견의 소지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적법한 도급이다’라는 둥 서울지방노동청의 판결에 극심한 불신을 갖고 있던 조합원들에게 다소의 희망이 보이는 중이다.


철도공사는 새로운 사장을 기다리고 있지만 승무원들은 투쟁을 다시 시작하기로 결정한 후 바로 서울역 릴레이 일인시위에 들어갔다. 철도노조 조합원들 내부에서조차 KTX승무원 투쟁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지도부가 교체되면서 각 지역과 단위 간부들도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일일이 현장을 돌며 순회를 하고 있다. 조만간 기자회견을 열어 본격적인 투쟁을 선포할 계획도 잡는 중이다. 다른 노조나 연대 단체와 같은 외부도 일일이 순회하고 알리기 위해서 투쟁 800일에 즈음한 연대의 밤도 생각하고 있다.

 

 


다시 ‘승무원 직접고용’ 투쟁 결의


“380명일 때에 비하면 다 나간 거나 마찬가진데 그만큼 의지가 약해진 거냐면 그렇지 않아요. 일당백인 것 같아요. (ㅎㅎㅎ) 380명일 때는 열 명이 간부고 나머지가 조합원이었다면 지금은 7,80명 전원이 간부인 거죠. 한 사람 한 사람이 의지도 자부심도 강하고 끝까지 함께 해서 꼭 승리할 거라는 믿음이 커요. 예전에 밖에서 저희에 대해 말씀하시는 분들이 ‘여자들끼리 대단하다’고 하셨을 때는 별로 그런 줄 몰랐는데 지금은 제가 우리 조합원들 보면 참 대단해요. 우리 조합원들이 부족한 저에게 잘 할 수 있다는 힘을 줘요.”


“우리의 가장 절실한 요구는 물론 승무원으로 다시 일하는 거죠. 지금 서울역에서 일인시위를 하고 있지만, 지나는 빨간색 승무원 유니폼을 볼 때마다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불끈불끈 솟아오르고, 이렇게 오래 파업했는데도 KTX열차가 지나가는 걸 보면 아직 저기가 제 자리 같아요”


마지막으로 그동안 KTX승무원 투쟁 소식이 궁금했던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저희가 너무 잠잠히 있어서 궁금하셨을 거 같아요. 살짝 휴식을 취했다고, 그냥 쉰 게 아니라 그만큼 힘들었다고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다시 봄이 돌아왔잖아요. 내부적으로도 결의했으니 연대의 힘을 입어서 다시 움직이려고요. 물론 저희보다 오래 투쟁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투쟁을 오래 하다 보니 흐름이란 게 있는 거 같아요. 최고조에 달았다가 점점 식었다가 다시 발돋움해서 시작했다가. 지금 저희는 다시 발 구르기를 하는 단계라고 생각해요. 조합원들은 줄었지만 누구 하나 투쟁을 그만둔 그들을 원망하거나 책임을 묻지 않아요. 우리는 내 의지로 여기까지 왔고 스스로 투쟁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만큼 더 정당합니다.” (참세상/최인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