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예술

진정한 보수가 그립다

녹색세상 2008. 4. 20. 16:07
 

살아서는 분당, 죽어서는 천당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신앙인의 모습은 이와 다른가? 우리나라 성도들만큼 천국에 대한 열망과 확신에 가득 찬 기독교인들은 전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아닌 말로 이 땅에서의 성공, 출세, 안락함 쯤에는 좀 더 너그러워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천국을 그토록 확신하는 우리나라 성도들이 불신자들보다 부동산, 현금, 출세, 성공, 안락함을 덜 사랑한다(마 6:19~24)는 증거는 눈을 씻고도 찾아보기 힘들다. 

 

▲880만명이 넘는 비정규직노동자 문제에 대해 한국교회는 ‘이웃사랑’이란 마음을 가져 봤는지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이랜드노동자인 이남신 집사는 ‘비정규직 없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라고 절교하고 있다.


우리사회 특권층이 밀집한 이른바 ‘강남’에는 한국평균보다 많은 교회수와 복음화율을 자랑하고 있지만, 강남의 교회들은 땅과 재물에 대한 강남 주민들의 높은 욕심(사 5:8), 희생에 대한 적은 헌신(마 23:2~4)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앞서 말한 대로 우리나라 부자들은 세계적 갑부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 같은 사회적 기여의 의지도 별로 없으면서 존경까지 받으려 한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돈과 권력에, 존경, 거기다가 천국까지 가고 싶어 한다.


한국교회는 입으로는 “오직 예수!”, “무익한 이 세상!”이라고 외치지만, 현실 속에서는 물질적 욕구에 거의 초연해 있지 못하다. 교권이든 정치권력이든 힘을 얻으려는 욕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므로 그러한 한국기독교와 교회지도자들을 진정한 보수라고 보기 힘든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교회가 무슨 돈이 있느냐 말할 것이다.아니다. 한국교회는 충분히 부유하다. 한국교회는 일개 교단 1년짜리 총회장이 되기 위해서도 수 십 억 원 정도는 거뜬히 허비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하다.


교회가 무슨 권력이 있느냐 말할 것이다. 아니다. 한국교회는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충분한 힘을 갖고 있다. 한국교회는 비위에 맞지 않는 자치단체장이나 기관장 정도는 윗선(?)을 동원해서 언제든지 갈아치울 수 있다는 자신감에 충만해 있다. 2005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불교 인구는 22.8% 10,726,463명으로 인구대비 22.8%인데 비해, 개신교는 8,616,438명으로 18.3%를 차지한다. 실제 정확성의 차이는 별개로 해도 아무튼 분명한 것은 개신교 인구보다는 불교인들이 꽤 많다.


그러나 불교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공개적으로 사회적 압력을 행사하는 일이 거의 없으나, 개신교는 걸핏하면 “1,000만 성도 단결하여~” “온 교회가 힘을 합쳐~좌시하지 않을 것이며~”를 부르짖는다. “한국교회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엄신형 한기총 대표회장 뉴스앤조이 167호) 그만큼 숫자의 힘을 믿는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이 싸움이 진리의 싸움이라고 생각하는가?(엡 6:12) 예수님의 가르침과 부합하다고 믿는가?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3)


목사가 정치인들의 정치스승?


한국교회의 돈과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갈 데까지 갔다. 성공해보니 더욱 미련이 크다. 한국교회는 바람이 들었다. 돈과 권력을 통해 힘을 행사해 본 자신감이다. 특히 최근 한국교회의 정치화바람은 정말 지나치다. 언제부터 목사들이 정치의 고수들이 되었는지 각 정당마다 목사들이 숨겨둔 정치고문처럼 활약하고 있다. 집권 한나라당을 살펴보면 인명진 목사는 당윤리위원장을 맡고 있고, 지난 대선에서 대운하 전도사라는 별명을 얻은 추부길 목사는 청와대 비서관이 되었다.


강명순 목사는 이번 총선을 통해 비례대표 1번으로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의장 김진홍 목사는 당직을 맡지는 않았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한나라당 재집권의 가장 큰 정신적 지주다. 지난 대선 시기 민주화운동 원로인 오충일 목사는 당시 집권당이던 대통합민주신당의 대표를 맡았고, 이번 총선에서는 아예 현직 목회자들이 중심이 되어 기독사랑실천당을 창당했다. 다시 원론으로 돌아가면 세상에 대한 책임을 갖고 있는 기독교인이, 그리고 목사가 정치와 사회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열심히 참여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종교와 정치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그러나 무턱대고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말하기에는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이미 정교분리 원칙은 서서히 깨어져 가고 있다. 정치와 종교는 결코 분리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나로 밀착되어서도 안 된다. 그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절한 거리와 역할, 관계를 심각하게 재설정해야 한다. 한때 유신반대(독재정권반대)운동은 정치참여라고 비난하면서도, 유신찬성운동(정권축복)은 정치참여가 아니라 국민 된 도리라고 말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도 어떤 당을 지지(또는 반대)하는 것은 정치참여이나, 반대당을 지지(또는 반대)하는 것은 정치참여가 아니라는 무원칙한 논리가 횡행하고 있다. 교회와 복음의 위신을 최소한이라도 지키기 위해서는 무조건 정교분리나 무조건 사회적 책임만 외칠 게 아니라 그 한계와 범위, 최소한의 공유기반이 있어야 한다. 이젠 우리의 참여는 괜찮고, 너희 참여는 위험하다 할 수 없다. 진보냐 보수냐 보다 하나님의 이름과 교회의 위신이 더 중요하게 지켜져야 할 가치다.


그러므로 시급히 원칙을 세워야 한다. 사람들은 왜 돈과 권력에 대해 관심이 많을까? 그것들이 우리가 현실사회에서 얻으려는 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얻게 해 주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도, 권력도 갖지 못할 때는 한없이 절망적이다가도 한번 맛보기 시작하면 그 정도면 족하다고 만족할 만큼 자제력을 갖지 못하고 끝없이 집착하게 된다. 종교인이라도 일단 돈과 권력의 맛을 보기 시작하면 진리의 싸움을 하지 않는다.


한국교회가 사학법 재개정을 그토록 목숨 걸고 외치는 이유는 정말 사학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인가(정말 그런 분들도 있겠지만), 아니면 학교를 사유재산이라고 믿기 때문에 국가의 감시에서 벗어나 맘대로 운영해서 수익을 남기고 싶은 것인가? 그런데 만약 전자의 관심이라면 수많은 기독교사학 비리들을 사학법이 없이 어떻게 바로 잡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대책도 말하지 않는가?


기독교인들은 정치를 통해 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현실적 혜택을 주는 법안마련에 힘쓸 것이라고 의심받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정치가 결코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 한국교회 목회자와 기독교인들이 오늘날 경멸의 대상이 되어있는 현재 정치인들보다 더 올바르고 정당하게 정치권력을 사용할 수 있으리라고 자신하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은 말리고 싶은 거다. 좀 더 세상을 바로 알고, 실력도 쌓고, 성실히 준비해서 대안적 기독교정당, 기독교정치를 해보자고 말하고 싶다. (물론 기독교인 개인의 정치진출은 당연한 자기 권리다)


보편적인 상식에 근거한 정당한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이번 총선에서 정치발전의 측면에서 보면 참으로 유해한 두 정당이 있었다. 하나는, 오직 “우리 억울하니 찍어 달라”며 줄기차게 특정 정치인의 사진만 부각시켰던 ‘친박연대’요, 다른 하나는 이것, 저것 정책들을 만들기는 했지만 그런 정책들보다는 “통일교 때려잡기 위해서는 기독교정당을 지지해야한다”는 선동만 부각시킨 ‘기독사랑실천당’이다. 내가 통일교정당인 ‘평화통일가정당’을 이상한 정당에서 제외한 이유는 내막이야 어떻든 그 당은 “통일교 만세!”를 주장한 게 아니라, 시종일관 ‘가정의 중요성’이라는 나름의 정책으로 승부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기독교정당’이라며 선전된 기독사랑실천당은 사회적 설득력 획득에는 거의 관심이 없이, 그저 “기독교인 모여라” “통일교 때려잡자”식의 감성적 호소만으로 일관했다. 그런데도 한국교회 소위 원로라는 분들은 이 정당이 기독교적 정체성을 갖는 대안정당으로 선전해 주었다. 바로 이게 한국교회의 정치인식의 현주소다. 이런 식의 운동은 교회인쇄물을 통해서는 얼마든지 전파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정당홍보자료집에 넣을 수 있는 내용은 아니다.


스스로 정당으로서의 실력부족, 함량미달, 명분부족을 광고한 셈이다. 혹시라도 사회에서 통일교가 불법을 행하면 법적으로 대응하면 된다. 통일교의 물품이 확산되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불매운동을 전개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이단일지라도 국민으로서, 정당한 기업으로서 사회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포교 또는 기업 활동을 전개하는 것을 정치나 법, 정책으로 부당하게 막을 수 있나? 기독교정치를 하려면 먼저 이러한 정치의 기본부터 충실해야 한다.


‘통일교 득세하니 기독당으로 맞서자?’ 묻자. 기독교성시화운동, 이명박 전 시장의 서울시 봉헌 발언은 거룩한 것이고, 통일교의 여수 확산은 불법한 것인가? 통일교 가정당 만큼 기독당을 반대하는 이유는 권력이나 돈으로 신앙을 사려는 행동은 모두 종교의 길을 벗어난 국가종교로의 탈선이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진리라면 이단의 방식과 태도와는 근본부터 달라야 한다(마 20:24~27). 우리도 권력과 돈을 갈망하면서 이단의 기업 활동과 권력추구는 비난하고, 우리도 크고 높은 건물 추구하면서 이단은 못 짓게 해야 한다는 식의 선동은 근본이 같은 짓이다.


진리는 그 자체가 갖는 품격이 있다. 가치의 문제는 돈이나 정치권력이 아니라 말씀의 권위와 진리로 싸워야 한다. 내 주장은 간단하다. 돈이든 정치권력이든 힘을 통해 종교를 확산하려 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럴수록 기독교의 가치가 떨어지고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 십자가의 능력에 의존하려는 간절함은 근원부터 말라버린다. 나는 이러한 왜곡현상이 오직 하나님과 말씀 밖에 모른다는 ‘소위 보수적’ 목사님들에게서 들려온다는 점을 정말 통탄한다.


진정한 보수와 진보, 그것을 넘어서는 그리스도의 신앙


대단히 무례한 말씀이지만 나는 감히 그들의 수 십 년 목회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복음과 십자가 정신에서 이탈했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이 새삼스레 차라리 진정한 보수가 그리워진다. ‘세상일은 잘 모르고 관심도 없다’며 자신이 섬기는 교회만 신앙세계의 전부처럼 알고, 마을의 몇 명 남은 주민들 밖에 모르는 시골교회 목사가 바로 진정한 보수다. 기독교세계관도 모르고, 현재적 천국도 모르지만 새벽마다 마룻바닥에 꿇어 앉아 “우리 목사님 축복해 주세요.”, “나랏님이 건강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옛날 할머니 권사님이 진정한 보수다.


물론 이 점은 소위 진보도 마찬가지다. 여간해선 잘 안 변한다. 개인적으로 내 개인적 소신은 우리사회 발전을 위해서는 분류상 보수적 태도보다 진보적 태도가 더욱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소위 진보세력이 우리사회의 올바른 발전을 위해 정치권력 획득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충분히 공감하나, 정치권력의 획득 또는 유지가 만능인 것처럼 여기는 태도는 정말 진보답지 않다. 속상해도 떨어지고, 패배할 수 있어야 진정한 진보다.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 특정정당이나 이념이 마치 하나님나라의 가치 실현인 것처럼 역설하거나, 한나라당만 대척하면 무엇이든 선인 것처럼 오해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의 최종 목표는 하나님나라지, 단순한 진보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보수와 수구는 다르다. 보수는 지켜야할 참된 가치에 집중하고, 수구는 기득권에 집착한다. 진보도 다 같지 않다. 참 진보는 만들어가야 할 가치에 집중하고, 진보이데올로기는 명예와 자기 의에 집착한다.


그러므로 보수적 태도든 진보적 태도든 참된 것이 아니면, 기득권을 추구한다. 한국교회가 걱정인 것은 사학법 재개정 논쟁, 목회자 납세논쟁에서 보이듯이 기득권조차 지켜야할 가치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 스스로 평가하자. 한나라당은 보수인가, 수구인가? 민주당은? 민노당과 진보신당은 참 진보인가, 거짓 진보인가?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보수인가, 수구인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참 진보인가, 거짓 진보인가? 뉴라이트운동은? 기독교사회책임은? 성서한국은? 교회개혁실천연대는? 그러면 나는?


그러나 한 걸음 더 나가자.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제 보수, 진보도 넘어서자. 우리 삶과 행동의 근거를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다시 확인하자. 만약 어느 목사가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기 부동산을 얼마나 갖고 이익을 얻든 무슨 상관이냐?”고 따진다면 그는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토지 공개념을 명시한 헌법 제123조, 민법 제2조, 민법 제212조 조차 지키지 않으려는 면에서 참다운 보수가 아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그러한 주장은 적어도 토지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장하신 최소한의 기본권이기에 하나님의 것으로 두고 맘대로 사거나 팔지 못하게 한 희년의 은혜(레 25:1~34)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요, 이를 어긴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사 5:8)를 무시하는 것으로 성경을 믿는 자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근거로 자신의 말과 행동을 묻고, 책임져야할 것이다. 이런 진지한 질문 앞에 서는 것이, 예수님 앞에 서는 것이라고  믿는다. (당당뉴스/구교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