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민중

70돌 삼성 ‘일사불란 문화’ 생명 다 했나?

녹색세상 2008. 3. 21. 15:30
 

내부제보ㆍ직원이탈…치밀한 조직관리 흔들

대외 이미지 실추에 조직 정상화 부담도 커


삼성전자의 한 고위임원은 삼성 비자금 사건 이후 당장 눈에 보이는 사업상 타격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대외 이미지 실추와 함께 내부 조직문화의 붕괴라고 말한다. 조직문화는 제품, 인적자원과 함께 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요소다. 오는 22일로 창업 70주년을 맞는 삼성 안에서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일들이 속출한다.

 

▲총수에 대한 강한 충성심과 조직우선주의로 특징되는 삼성그룹의 조직문화가 지난해 10월말 비자금의혹 사건 이후 크게 흔들리는 모습이 잇따라 노출되고 있다. 오는 22일로 창업 70주년을 맞는 삼성그룹의 서울 중구 태평로 본관. (사진: 오마이뉴스)


“우리가 밤잠 안자고 피땀 흘려서 오늘의 삼성을 만들었는데, 구조본의 몇 명이 다 망쳐 놨다.” 얼마 전 전직임원 모임에서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삼성전자의 전직 최고경영자가 한 말이다. 전략기획실 수뇌부인 이학수 부회장과 김인주 사장의 책임론을 제기한 것이다. 이건희 회장이나 전략기획실의 말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조직우선주의와 강한 충성심이 몸에 밴 삼성맨들에게는 충격이었다. 입사 30년째인 한 계열사 전무는 “전략기획실에서는 비자금이나 로비 의혹을 부인하지만 이미 드러난 것만으로도 대국민 사과, 책임자 퇴진은 물론 앞으로 어떻게 새롭게 바뀌겠다는 약속이 나왔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회장의 직접 책임론도 제기된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삼성 임원을 만났더니 이 회장이 전략기획실에 기댈 게 아니라, 과거 현대차나 에스케이사태처럼 직접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한다고 말해 놀랐다”고 전했다.


계열사의 비자금 조성이나 증거인멸 등에 관한 내부제보가 계속 이어지는 것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한국 최고기업에 다닌다는 자부심에도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신입사원 교육 때 비자금 사건에 관한 질문이 나오는가 하면, 젊고 유능한 직원들의 이탈현상도 심상치 않다. 삼성전자의 한 과장은 “매일 회사에 대해 안 좋은 뉴스가 나오니까 가족과 함께 텔레비전 보는 것도 꺼린다”고 털어놓았다. 서울대 사회대의 한 대학원생은 “최근 삼성에 다니던 친구가 그만뒀는데, 가장 선망 받는 직장이었던 삼성을 바라보는 눈도 변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관리의 삼성’으로 불릴 정도로 치밀한 조직관리를 자랑했던 삼성이 흔들리는 것은 임직원들에게 ‘깨끗한 조직’을 유달리 강조해온데 대한 반작용도 있다. “삼성은 부정하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이 회장이 지난 95년 신경영 특강에서 정도경영을 강조하며 한 말이다. 최근 서울 서초동 삼성 새 사옥에 입주한 계열사의 임원은 “신입사원들이 가장 먼저 교육받는 게 거래처 사람들과 일체의 부정행위를 하지 말라는 윤리경영 철학”이라며 “경영상 필요에 의해 어쩔 수 없었다거나, 다른 기업들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위안을 삼아보지만, 대다수 임직원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일부 임원의 경우 회사의 위기를 틈타, 개인 이익을 탐하는 ‘도덕적 해이’까지 보인다. 특검에 불려갔던 임원 중 일부는 ‘이제 누구도 나를 건드리지 못한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계열사의 한 간부는 “조직의 비리와 약점을 쥐고 있으니, 알아서 하라는 얘기 아니겠느냐”고 말끝을 흐렸다.


삼성 임직원들은 특검 결과도 문제지만, 그 이후가 더 걱정이라고 말한다. 삼성은 비자금사태 여파로 지난해 말과 올해 초 정기인사를 못했다. 계열사의 한 임원은 “정리 대상이었다가 인사보류로 싸놨던 짐을 다시 푼 임원만 수백 명”이라면서 “이 때문에 삼성 안에서 김용철 변호사에게 고마워하는 사람들이 수천 명이라는 얘기도 있다”고 말했다. 삼성 구조본에서 근무했던 계열사의 한 임원은 “회사에 불만을 갖고 그만둔 사람들이 자칫 비리를 폭로할까봐 인사를 못한다는 얘기가 많다”며 “인사도 제대로 못하는 회사가 발전할 수 있겠느냐”고 답답해했다. (한겨레/곽정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