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만 보면 한국의 민주화는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중남미나 동남아시아와는 달리 군부 세력은 이제 더 이상 한국 정치의 주요 변수가 아니다. 전두환, 노태우를 어떻게든 재판에 회부한 것도 예를 들어 칠레 같은 나라와는 확연히 구별가는 대목이다.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는 죽을 때까지 어떠한 단죄도 받지 않았다. 한국 사회는 또한 한 차례 정권 교체를 경험하기도 했다. 군부 독재 정권 시절 가장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던 야당 정치인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일이 벌어졌다.
어떻게 보면 한국은 아시아에서 혁명 비슷한 사건을 통해 민주주의가 정착한 거의 유일한 나라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중대한 문제점과 한계가 존재했다. 무슨 문제들이었는가? 우선 그 주인공에게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또한 그 의제에 문제가 있었다. 이제부터 그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 이건희 삼성 회장과 노무현 대통령 (사진=뉴시스)
민주화의 주역들이 분열하다
첫째, 민주화의 ‘주인공’의 문제를 살펴보자. 한국에서는 민주화를 위해 싸운 대중들이 곧바로 분열되었다. 그리고 이 분열은 좀처럼 극복되지 못하고 점점 더 곪아들어 갔다. 남한에서는 오랫동안 노동자, 농민이 독자적 정치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80년대 민주화 투쟁 당시에도 노동자 민중은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해 있지 못했다. 민주화 운동의 주도권은 보수 야당이 쥐고 있었다. 치열한 학생운동이 있었고 85년 무렵부터는 민주노조운동도 불붙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민주화 운동의 정치적 상징은 김영삼, 김대중이었다.
그런데 198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이들 양김 씨가 대통령이 될 욕심에 보수 야당을 둘로 가르고 말았다. 그러자 ‘민주 대 반민주’ 구도에 더해 ‘지역’이라는 새로운 대립 구도가 등장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민주주의라는 공통의 대의 아래 호남 민중이 따로 없었고 영남 민중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87년 대선 뒤부터는 (그리고 사실 지금까지도) 어떠한 다른 대의도 ‘지역’이라는 분열선을 쉽게 넘어서지 못했다.
운동권이라 불린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90년대 내내 선거만 다가올라 치면 이른바 ‘새로운 피의 수혈’이 있었다. 선거 때마다 재야 명망가들이나 학생운동 경력자들 혹은 노동운동 상층 간부들이 김영삼, 김대중 중 어느 한 쪽에 줄을 대서 지역주의 보수정당의 공직자 배지를 단 것이다. 일단 이런 식으로 흡수되고 나면 모두들 지역주의의 들러리가 되거나 보수정치의 새로운 주역으로 거듭 났다. 이러한 주체의 분열은 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등장한 민주노조운동에서도 나타났다. 새롭게 등장한 민주노조들은 하나같이 ‘기업별’ 노동조합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법적으로 그것 외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노동조합’이라는 이름을 단 조직들이 기업 단위로 쪼개져 존재한다는 것은, 일본 정도를 제외하면,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노동자들은 새롭게 민주노조를 건설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기업 단위로 분열된 상태에서 시작한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의 초기에는 이러한 문제가 그렇게 도드라져 보이지는 않았다. 대기업 노조든 중소기업 노동자든 모두 자본가와 국가의 극성스러운 탄압에 시달렸기 때문에 서로 활발한 연대 투쟁을 벌였고 동지라는 의식도 강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여러 가지 조건들이 바뀌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어느 한 쪽은 임금이 오르는데 다른 쪽은 그렇지 못하거나 심지어는 어느 한 쪽이 임금이 오른 것 때문에 다른 쪽 노동자들이 고달파지는 현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단 이런 현실이 부각되자 노동자들 내부의 분열 양상이 걷잡을 수 없이 강화되었다. 그래서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사회 경제적 민주주의를 요구할 주역인 노동계급이 스스로 분열의 덫에 빠져 제 역할을 못하는 형편이다.
먹물들 사이의 타협이 민주화 과정을 지배하다
둘째, 민주화의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를 보자.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지배한 것은 상층 엘리트 간의 타협이었다. 비록 엄청난 대중 동원이 반복적으로 나타났지만, 그 정치적 과정은 항상 기득권 세력 간의 타협으로 끝났다. 87년 6월 전국의 거리는 역사책에 나오는 혁명의 순간을 방불케 했다. 어떤 때는 한 장소에 무려 100만 명 가까이 모이는 일도 있었다. 이런 기억 때문에 한국의 민주화는 ‘아래로부터의’ 투쟁의 산물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대중의 힘이 직접 영향을 미친 것은 딱 여기까지 만이었다. 군중 동원 그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다. 대신 정치적 방향을 결정한 것은 군부 정권과 보수 야당의 상층 엘리트들이었다. 그 예고편은 1986년 4월 30일의 청와대 3당 합의였다. 이 때 군부 정권과 보수 야당은 국회 합의를 통해 개헌을 추진한다는 데 합의했다. 여기서 우리는 ‘국회 합의’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당시 ‘국회’란 군부 독재 세력과 보수 야당 양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헌법 개정이라는 전 국민적 사안을 정권과 보수 야당만의 협상과 합의로 처리하겠다는 것. 여기서 빠져 있는 것은 결국 누구인가? 바로 정작 민주화 운동의 주역인 거리의 대중이다.
이러한 타협의 연장선 위에 6. 29 선언이 있다. 6. 29 선언은 거리의 대중에 대한 군부 정권의 ‘항복’ 선언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단 위기부터 넘기고 보려고 보수 야당에게 타협을 제안한 것이기도 했다. 6. 29 선언 어디에도 민주화의 실질적 조치는 담겨 있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다만, 양김 씨에게 대통령 직선의 기회를 보장해주겠다는 약속이었다. 제6공화국의 헌법은 4. 30 합의 그대로 기존 국회 원내 정당들 사이의 협상만으로 만들어졌다. 오로지 그 해 12월의 대통령직선 일정에 맞추기 위해 가을에 밀실에서 전격적으로 새 헌법을 만든 것이다. 이 과정을,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민주화 이행을 한 브라질과 비교해보자.
브라질에서는 민주 체제의 새 헌법을 만들기 위해 의회를 새로 소집했다. 이 의회는 ‘제헌의회’라 불렸다. 그리고 약 2년에 걸쳐 개헌 토론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민주화 투쟁에 참여한 여러 사회 세력들의 요구가 의제에 올랐다. 개중에는 노동권의 신장을 원하는 노동조합들도 있었고, 농지 개혁을 바라는 농민운동 조직들도 있었다. 외채 문제를 우선 해결해야 한다는 시민사회의 목소리도 있었고, 아마존 생태계를 지키자는 환경운동의 주장도 있었다. 지금의 브라질 헌법이 이들 요구를 완벽히 충족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우리와 비교해보면, 브라질에서는 적어도 대중의 목소리를 민주화 과정에 반영하려는 노력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987년의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이후에 비슷하게 재연되었다. 노태우 정권 이후 등장한 김영삼 정권과 김대중 정권은 모두 1992년의 3당 합당과 1997년의 DJP연합이라는, 군부 잔당들과의 타협에 기반을 두었다. 3당 합당이나 DJP연합이 족보 없이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다. 어쩌면 이들 야합은 87년 이후 한국 민주화 과정으로부터의 일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상 궤도 안에 있었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 사실 타협을 통한 민주화가 우리만의 사례는 아니다. 1970년대 스페인의 민주화 과정도 비슷했다. 스페인에서는 1975년 독재자 프랑코가 죽고 나서 민주화 이행이 시작됐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도 역시 기존 지배 세력과 야당 사이의 타협에 따라 민주화의 방향과 일정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그 때 스페인의 야당은 좌파정당인 사회노동당이었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는 좌파정당뿐만 아니라 노동조합도 협상에 참여했다. 반면 한국에서는 노동조합이 중요한 제도 정치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됐다. 1996년 연말에 시작된 노동법 개악 반대 총파업은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가 정치적 실체로 부상한 중대한 사건이었는데, 그럼에도 그 결말은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노동조합을 배제한 채 정부와 보수 야당만의 협상이 진행됐고, 그래서 원래의 노동법 개악안이 거의 그대로 다시 통과되었다.
한국의 민주화는 ‘약한’ 민주화였다
셋째, 민주화의 ‘의제’ 측면에서 나타난 문제를 보자. 한국의 민주화는 철저히 정치적 민주화의 좁은 틀 안에서 추진되었다. 사회 경제적 민주화는 관심에서 비껴났고, 더 나아가서는 최근까지도 탄압과 배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것은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10년이 지나도록 민주노조의 활동이 각종 노동악법의 족쇄에 묶여 있었던 데서 잘 드러난다. 민주노조의 전국조직인 민주노총이 합법적 지위를 부여받은 게 불과 10년밖에 안 된다. 그나마도 공무원노조는 여전히 각종 제약 아래 놓여 노동조합으로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반면 다른 나라에서는 민주화 초기부터 사회 경제 민주화가 의제의 중심에 오른 사례들이 많이 있다. 위에서 이미 살펴본 스페인만 해도 그렇다. 프랑코 독재 정부가 물러나고 제일 먼저 추진한 것 중 하나가 노동조합의 권한 강화였다. 포르투갈은 더 했다. 포르투갈에서도 스페인과 같은 시기에 민주화가 시작됐는데, 스페인과 달리 민중 혁명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1976년에 개정된 이 나라의 헌법은 정치적 민주화뿐만 아니라 대중의 사회 경제적 권리 신장을 약속하는 내용들이 풍부히 담겼다. 그 중에는 심지어 자본가들이 노동자 파업에 맞서 직장을 폐쇄하는 것을 원천 금지하는 조항까지 있었다.
브라질 제헌의회에서도, 위에서 소개한 대로, 사회 경제 민주화 조치들이 활발히 논의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사안은 노동권의 완전한 보장이었다. 그래서 브라질의 새 헌법에는 120일의 유급 출산휴가, 노동시간 단축, 여성과 여타 가내 노동자들에 대한 노동권 적용 확대 등 굉장히 구체적인 노동권 관련 조항이 담기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헌법의 내용으로는 좀 시시콜콜하다 싶을 정도로 상세하게 말이다. 하지만 이와 달리 우리는 형식적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는 지금까지도 정치 의제의 협소함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다. 17대 국회에서도 그랬다. 정부와 여당이 추진한 이른바 ‘4대 개혁’ 안에는 서민들의 살림살이에 직접 보탬이 되는 사회 개혁의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지를 더 각박하게 만드는 비정규직 관련 악법이 허울 좋은 비정규직 ‘보호’ 법안이라는 명목으로 통과됐다.
결국 이러한 문제점들―주체의 분열, 엘리트간 타협의 과정, 의제의 편협함―은 한국의 민주화가 ‘허약한’ 민주화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어떤 점에서 ‘허약’했는가? 군부 독재 정권 아래서 온갖 기득권을 누리던 사회 세력들에 대해서는 거의 손을 댈 수 없었다는 점에서 그랬다. 이들 기득권 세력의 이해를 조금이라도 침해할 수 있는 개혁은 거의 추진되지 못했다. 그 기득권 세력의 중심에 있는 게 바로 자본, 특히 ‘재벌’로 상징되는 거대 자본이다.
군부 독재의 뒤를 이은 자본 독재
자본에 맞서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사회 세력은 노동운동이었다. 하지만 민주노조운동조차도 기업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자본에게는 그렇게 두려운 도전자가 되지 못했다. 대기업 노동조합들의 치열한 쟁의 행위는 재벌 독점자본의 권력을 문제 삼는 게 아니었다. 단지 이들을 기업 단위 교섭 테이블에 불러들이기 위한 압박에 불과했다. 따라서 민주화 투쟁의 절정기에도 거대 자본의 권력은 거의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권력을 강화했다. 우선 80년대 중반 3저 호황으로 엄청난 규모의 자본을 축적했다. 이제 한국의 독점 자본은 그들 스스로 초국적 자본으로 비상하길 꿈꾸기 시작했다. 또한 민주화도 대자본에게 기회로 다가왔다. 군부 독재 정권이 힘이 약해지자 재벌들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이들은 국가보다 더 위에 군림하려 했다. 거대 자본이 직접 권력의 주역으로 나서고자 한 것이다. 이것을 현학적으로 표현한 게 “권력을 시장에 넘겨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 구호가 곧 ‘자유화’였다.
97년 외환위기조차도 거대 자본의 힘을 누그러뜨리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굳게 다지는 결과를 낳았다. 비록 일부 재벌들이 퇴출당하기는 했지만, 이른바 ‘빅딜’을 계기로 삼성, 현대 등 극소수 거대 자본은 더욱 막강한 권력을 차지했다. 급기야는 그 권력이 좁은 경제 영역을 넘어서 사회 구석구석으로까지 뻗어나가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삼성 공화국’이라는 자조 섞인 유행어까지 나돌게 됐다.
진보정치연구소는 2005년 5월 1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이러한 한국 사회의 현실을 ‘기업지배사회’라고 규정한 바 있다. 여기서 ‘기업’이란 말은 다름 아니라 ‘자본’을 지칭하는 또 다른 표현이다. 이 보고서는 기업지배사회를 “기업의(사실상은 지배적 기업, 즉 재벌 독점자본의) 단기적 이해와 편향된 가치가 사회 전체의 장기적 이해와 이에 대한 민주적 논의 결정 구조를 억압 왜곡하는 상황”이라고 정의한다. 지금 한국 사회는 자본의 편협한 단기적 이해 때문에 사회의 다른 모든 가치와 이익, 저력을 낭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기업 장부에 흑자 수치를 늘리기 위해 하청 중소기업의 제조 단가를 무조건 낮추라고 요구하는 게 바로 그런 횡포 아닌가? 수많은 젊은이와 여성들을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그야말로 잠깐씩 쓰다가 소모품처럼 내버리는 것도 그런 것 아닌가? 그렇게 해서 뽑아낸 이윤으로 주식 배당금 잔치를 벌이고, 남는 돈을 부동산 투기에 쏟아 부어 불로소득을 누리는 게 다 그런 짓 아닌가?
이쯤 되면 민주주의의 1인1표I(누구나 동등한 권리를 행사한다)의 원칙은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봐야 한다. 그보다는 시장의 1원1표의 원칙(돈이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은 권리를 누린다)과 주주총회의 1주1표의 원칙(주식이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은 권리를 누린다)이 사회를 지배한다는 게 옳겠다. 이것은 사실상 인민이 아니라 자본이 주인 노릇하는 국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한 마디로 ‘자본 국가’라고 부른다.
자본 국가는 기업지배사회의 정치적 측면(누가 권력을 쥐고 있는가?)을 좀 더 부각시킨 개념이다. 자본 국가는 자본의 권리가 사회의 다른 모든 권리들에 우선하는 정치 사회 체제다. 자본의 이윤 추구가 민중의 행복 추구에 우선하고, 소유권 경영권 행사가 다른 기본권의 보장보다 더 중요시되는 것이다.
자본 국가는 또한 ‘시장 국가’이기도 하다. 자본 국가에서는 자본의 고삐 풀린 자유가 활개 치는 ‘시장’ 영역이 사회의 다른 영역에 비해 항상 우위에 서고, 더 나아가는 시장이 사회의 다른 부분을 자신의 식민지로까지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약한’ 민주화의 귀결은 ‘약한’ 민주 국가였고, 그 틈을 비집고 성장한 게 결국 자본 국가, 시장 국가다. 피를 흘린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엄한 자들이 제 뱃속을 채웠다. 그리고 이제 자본 국가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오직 국내외 거대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만 골몰한다. 최근의 그 결정판이 바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다. 한미 FTA는 단순한 무역협상이 아니다. 한국 사회를 국내외 거대 자본의 입맛에 맞게 송두리째 바꾸려는 일종의 ‘위로부터의’ 혁명이다.
상황이 이러니 한국 사회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파도에 가장 빠른 속도로, 가장 파괴적으로 휩쓸리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 자본 국가, 시장 국가는 세계화에 맞서 민중의 권리를 방어하려 하기보다는 도리어 앞장서서 다수 대중의 삶을 짓밟으며 자본의 권리를 늘릴 대로 늘린다. 양극화를 제어하기보다는 그것을 유례없이 증폭시키고 있는 것이다. 김동춘(성공회대 교수, 사회학)도 한국 사회를 우리와 비슷한 각도에서 분석한다. 그는 작금의 한국 사회가 ‘기업사회’로 변해가고 지적한다. 김동춘이 정리하는 기업사회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자본의 고유한 권력인 생산 지휘권이 극대화되고 사회 영역으로 확대된다.
2. 정치ㆍ사회가 기업 활동을 통제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에 봉사하는 역할을 한다.
3. 기업의 생산성이 곧 국가나 사회의 생산성으로 간주된다.
4. 1인1표의 원리가 아닌 소유 지분만큼의 권리 원칙이 기업 외의 사회 조직에도 적용된다.
5. 대기업 및 기업가 단체가 단순한 경제문제뿐만 아니라 정치ㆍ사회 영역에까지 간섭한다.
6. 정치 활동ㆍ정책 활동, 법원, 언론 등은 주로 대기업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7. 국민ㆍ시민, 주민 혹은 기업의 판매망 안의 모든 사람들은 곧 소비자로 불린다.
8. 모든 정부, 사회 조직의 우두머리는 경영자를 이상적인 역할 로 설정한다.
9. 조직의 목표가 기업과는 가장 거리가 먼 조직, 예를 들면 교회와 학교까지도 기업의 모델을 따라서 자신을 재조직한다.
10. 정치, 사회 엘리트층까지도 주로 기업 경영자 출신이 차지하게 된다.
11. 노조활동은 대체로 기업 경영의 방해물로 간주된다.
12. 행정부는 기업조직을 모델로 한다. 정부 부처 중에서는 경제 부처가 다른 모든 부처를 압도한다.
13. 경제학이 사회과학 중의 사회과학이 되고, 또다시 회계학과 경영학이 경제학을 대신한다.
14. 경쟁력이 없는 것은 곧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된다. 공공성은 곧 무책임과 동일시한다. (진보정치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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