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경제

자주-평등 ‘동거노선’ 폐지돼야

녹색세상 2007. 12. 10. 16:49
 

대선 이후, ‘진보 자민련’ 질곡 벗어나기 위해


  대선이 별로 재미가 없다. 그래서 어차피 뻔한 결과를 놓고 미리 평가를 해봐도 될 것 같다. 올해 대선을 통해 우리가 얻게 될 최대 교훈은 이미 예정되었다. 그것은 ‘87년 체제의 종말’이다.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는 막판이 되면 49대 51의 양자구도로 짜인 모습이었는데, 정동영은 이런 양자구도의 설정에 실패했다. 이것은 87년식 세계관으로 무장한 채 20년을 달려온 자유주의자들에게 사상 최악의 패배라는 점에서 한국정치사의 한 분기점이다. 바야흐로 87년 체제의 종말이다. 87년 체제란 군사정권에 저항하기 위해 민족주의부터 사회주의까지 모든 세력들이 민주대 반민주 대결구도에 복무해야한다는 시대정신을 말한다.


  이러한 역사적 조건 때문에 우리는 2002년까지 반한나라당 단일전선과 비판적 지지에 시달려 왔다. 그러나 올해 대선에서는 이러한 흐름이 사실상 소멸되다시피 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평가지점이다. 이 결과 자주ㆍ민주ㆍ통일 이라는 구호의 설자리가 없어졌다. 자주, 민주, 통일이란 군사정권 시절에 적용되던 변혁이론 체계이다. 민족해방운동론에 의하면 미국의 한반도 지배는 군사적 지배-정치적 지배-경제적 지배-사회적 지배의 순서를 거쳐 관철된다. 여기서 최초의 고리인 군사적 지배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남한의 군사정권이었다. 따라서 87년식 민주와 반민주 대결구도의 소멸이란 곧 자주, 민주, 통일 이라는 개념체계의 붕괴로 이어진다.

 

▲ 결과가 뻔히 예상되는 2007년 대선은 87년 체제의 종말을 의미한다. 사진은 유세를 듣고 있는 청중들.



범여권의 붕괴와 빈공간의 발생


  87년 체제의 붕괴가 의미하는 중요한 부분은 첫째 이것이 이른바 범여권의 몰락을 뜻한다. 주지하듯이 소위 범여권은 87년식 전략과 노선 위에 기초해 있다. 즉 반한나라당이라는 포지션 외에는 별다른 콘텐츠가 없는 상태이다. 그런데 87년 체제의 소멸에 의해 이러한 원천적인 위치조차 그 기초가 흔들리게 된다. 아무리 ‘도로 열린우리당’에서 자기가 민주ㆍ평화ㆍ통일ㆍ개혁세력이라고 떠들어봐야 사람들은 별 관심도 없다. 지금은 민주 평화 통일 개혁세력이란 정체성이 전혀 매력이 없는 상황이다. 이런 앙상한 전략은 대중의 머릿속에 단지 친북온정주의 정도로 비춰질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낡은 전략은 도로 열린우리당을 좌파와 우파의 중간에 끼여서 꼼작 못하게 만드는 전형적인 샌드위치 위기로 몰고 가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중간지대의 위기에 의해 형성될 거대한 정치적 빈 공간을 민주노동당이 차지할 만한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역사책대로라면 의당 중간지대의 몰락에 따라 형성된 빈공간을 노동자 정치세력이 가져가야 한다. 그러나 이를 민주노동당이 흡수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른바 ‘자주와 평등’이라는 동거주의 노선 때문이다.


  동거주의 노선은 ‘자주와 평등’이라는 구호에서 보듯이 얼핏 보아 좋은 말들을 다 모아 놓은 듯 근사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당을 이리 가지도 못하고 저리 가지도 못하게 만든다. 차라리 북한 핵을 아예 대놓고 옹호했다면 벌써 결판이 났을 텐데 아직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민주노동당은 친북당ㆍ민주노총당ㆍ데모당 이미지를 돌파 불가능한 태생적인 굴레로 숙명처럼 받아들인 채 마치 자유주의 세력처럼 좌우를 방황하면서 천년만년 5%짜리 소수정당의 길을 걷게 된다. 김정진 변호사는 이를 가리켜 일찍이 ‘진보 자민련의 길’이라고 설파했다.


좌우개념의 재정립


  여기에서 우리는 ‘좌우의 재정립’에 대한 새로운 열망을 갖게 된다. 즉 민주노동당 내부적으로 동거주의 노선을 파탄내면서 당 밖으로 본격적인 좌-우 대립구도의 형성에 대비할 새로운 좌파의 근거지가 필요하게 된다. 민족주의의 원래 고향은 우파 마을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민족주의가 진보로 구분되어왔다. 군사정권이 분단문제를 권력연장의 수단으로 악용하던 시절, 민족주의는 진보적 성격을 띨 수 있었다. 수구세력들은 자신들의 반민족적 행각 때문에 합리적 우파로 변신하는 과정에서조차 적극적으로 민족주의를 우파의 이념으로 채택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통일운동이 관변단체들의 여름 정기 행사처럼 되어버린 시점에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87년 체제의 종말과 그 주체들의 몰락으로 민족주의를 진보로 구분하게 만든 역사적 조건의 소멸을 선언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 민족주의는 본래의 자리이던 우파의 방석 위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한국의 정치 발전 단계상 꼭 필요한 ‘좌우의 재정립’이다.


  당연히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전략도 이제부터는 민족을 배제하는 전략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의 좌파가 민족주의와 한 이불을 덮고 있는 좌파였다면 이제 민족문제와는 결별한 좌파, 최소한 친북 논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좌파의 등장을 공식 선언할 필요성이 적극적으로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민족’이라는 간판을 떼어버리고 한국작가회의로 개편된 것은 작지만 향후 커다란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이제 민족주의 유전자를 삭제한 새로운 진보 생명체를 잉태할 때다. (레디앙/홍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