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년 이한열 열사 영결식에서 열사들의 이름을 부르며 피눈물로 절규한 문익환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으로 유명한 영변(寧邊)을 기억하시는가. 그곳에 북한의 핵시설물이 있다고 호들갑을 떨던 시절이 있었다. 그 해 한반도에 거주하는 거의 모든 이들은 ‘북폭’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실제로 전쟁발발 48시간 전에야 우리의 대통령은 그 사실을 통보받았다. 그리고 그 일이 있기 얼마 전, 같은 해(1994년) 1월 18일 한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나갔다. 그의 장례식은 마로니에 공원에서 치러졌다. 망자(亡者)는 ‘늦봄’ 문익환이었다.
같은 날, 이승만 정권부터 박정희 정권까지 줄곧 권력의 핵심에 머무르던 한 인사의 장례식도 있었다. 권력의 그림자는 화려했다.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수많은 인사들이 그의 장례식에 직접 참석하거나 화환을 보냈다. TV에서는 그 소식이 매시간 뉴스로 흘러나왔다. 그의 이름은 정일권이었다.
버려진 사선, 철길을 따라 민중의 가슴 차표를 쥐고
그날은 서울시내 곳곳에 진눈깨비가 흩뿌려지던 날이었다. 늦봄의 장례식은 화려하지도 않았고, 그 흔한 정치인의 화환도 없었다. 수백 개의 검은 만장만이 그의 장례식을 묵묵하게 이끌었다. 김영삼의 똘마니인 최형우가 조문을 왔다가 흥분한 문상객들에게 몰매를 맞을 뻔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도망치듯 가버린 일은 있었다.
날은 추웠고, 옷은 젖어갔다. 그러나 아무도 대오를 떠나지 않았다. 우산을 쓰는 사람도 없었다. 늦봄 문익환은 가는 날까지 우리들의 얄팍한 양심의 옷깃을 둔중하고도 질퍽하게 적셨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강퍅한 논리와 날선 목소리로 대중의 등을 떠미는 사람이 아닌, 따뜻한 감성과 무차별한 애정으로 대중과 함께 걸어가는 사람.
그의 삶에는 이런저런 굴곡과 암전(暗轉)이 고루 존재한다. 그 누구보다도 우리의 현대사와 맞닿은 삶을 살다 이제는 우리의 영혼 한 모퉁이에서 영생을 얻은 늦봄 문익환의 세월을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총장이자 시인이기도 한, 김형수가 한권의 책으로 냈다. 이름 하여 <문익환 평전>이다.
그대 철책면류관 쓰고 저 언덕을 오르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문익환은 자타가 공인하는 ‘예수쟁이’이다. 한반도 남쪽에서 ‘예수쟁이’들은 흔히 존경과 애정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자신들끼리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짜증’과 ‘귀찮음’을 유발하는 존재일 가능성이 더 높다. 특히, 걸핏하면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여, 성조기를 흔들며 바다 건너에 위치한 나라의 대통령의 만수무강과 반도 북쪽 동포들의 조속한 절멸을 눈물과 콧물 그리고 통성기도로 기원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다다른다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Game Over!
우리시대의 예수는 단언컨데 그들이 늘 상 중얼거리는 ‘(자신들만의) 낮은 곳’으로는 오지 않을 것이다. 만약 예수가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온다면, 그 자리는 반드시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심지어 불결하게 여기는 곳일 터이다.
늦봄 문익환의 청·장년기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존경받는 목사였고, 목회와 신학연구에만 전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가 왜 그 ‘좋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빨갱이들의 대오’에 합류했던 것일까. 심지어 명색이 ‘목사’인 그가 ‘종교의 자유를 부정한다’고 남한의 모든 이들이 믿어 의심치 않는 북한(북한식 표현으로는 ‘공화국 북반부’)까지 가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돌아오기까지 했을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막연히 말하거나, ‘그냥 갈라진 채 살아도 되는 것 아니냐’는 식의 무뇌아적인 뇌까림이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단지 하나의 정치적 상징이거나, ‘미친 목사의 쇼’라고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만이다.
압록강 줄기 그리움 일렁이며 흐느끼는 당신의 노래
늦봄 문익환이 ‘영원한 청년’ 윤동주의 불알친구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다. 윤동주의 첫 시집이자 유고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최초로 출간한 사람이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문익환의 어릴 적 벗들 중에는 민족독립전쟁의 한 가운데에서 ‘동북항일연군’의 전사로 사망한 이들도 적지 않다. 청년 시절의 친구였던 친구인 장준하가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후 일주일을 식음을 전폐한 후 강단 대신에 거리 목회를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늦봄 문익환을 ‘한반도를 상대로 목회를 했다’고도 했다. 그래서 자신의 호를 ‘늦봄’이라지었다고 한다.
문익환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민족과 인민(人民)에 대한 샘과 같은 연민’은 바로 이러한 벗들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겉보기에 조용하고 넉넉한 목회자로 사는 동안에도 그의 영혼은 끊임없이 시대를 들여다보고 있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가 비로소 몸을 일으켜 ‘시대’를 정면으로 응시했을 때, 그의 몸짓은 자연스러웠고 당당했다. 모든 이들이 숨죽이고 침묵하는 그 ‘마지막 어둠의 때’가 바로 한 시대의 지성과 양심이 반드시 행동해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피투성이 십자가 매고 죽음을 넘어 부활하는 산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생전에 ‘고귀한 자들’보다는 ‘낮고 비천한 자들’을 향해 걸어갔다는 이유로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못 박혔다. 당시의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성소(聖所)를 때려 부순 ‘근본도 모르는’ 예수를 이해할 수 없었고, 당연히 죽였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내세우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권위의 성소’을 부정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삶은 보다 윤택하고 평이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러했다면, 예수는 그저 그런 한 명의 ‘선지자’일 뿐, 구세주(메시아)의 이름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는 세상을 향해 ‘증오’와 ‘파괴’ 그리고 ‘복수’의 신(神)이 아닌, ‘사랑’과 ‘정의’의 신(神)을 약속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기꺼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
우리 지친 어깨 일으켜 떨리는 손을 마주 잡는다
늦봄 문익환의 생을 예수와 비교한다는 것은 다소 무의미하지만, 나는 우리나라의 목회자 가운데 그토록 자신의 종교의 구세주와 비슷한 길을 걸어간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시시때때로 신문지면을 낭비하게 하는 대형교회의 목사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러한 심증은 더욱 구체화된다. ‘원로’라고 자칭하면서,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를 응시하는 그 모든 행위들을 거부하고 심지어 반대하는 뒷방 노인네들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반대한다고 한다. 이유는? 광화문에 인공기가 뒤덮인단다. 그러나 정작 그 ‘불법적인’ 인공기를 들고 나와 ‘불 쇼’를 펼치는 자들은 바로 그들 자신이다. 과거사 청산도 그들은 반대한다. 이유는? ‘경제도 어려운데 웬 과거청산?’이란다. 그렇다면 그들은 얼마나 서민경제의 실상에 대해 알고 있는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면, 지하철 요금이나 아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현행 ‘사립학교법’의 개정을 주장한다. 이유는? 그들 중 상당수가 사립학교의 이사장이거나 이사니까. 다른 이유는 없다. ‘주사파 교육’이니 뭐니 너저분하게 갖다 붙이지 마시라. 속 보인다.
그대 오르는 부활의 언덕
지금 한반도 남� 땅에는 ‘전선’이 따로 없다. 지난 80년대처럼 단일전선으로 집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모든 일상의 세세한 부분이 모두 전선이다. ‘수구’에는 세대가 따로 없다. 극우보수 세력의 집회장마다 단골손님으로 초청되는 젊은 ‘양아치’들도 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그들에게는 뇌가 없다는 것 뿐.
‘북한의 핵’이 다시 뉴스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게 꽤 됐다. 오래 묵은 종기가 제대로 곪아서 터진 꼴이다. 너도 나도 원인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느라 바쁘다. 물론 이 와중에 살판난 건 수구들을 위시한 ‘어린 백성들’이다.
그냥 솔직히 말하라, 수구들아. 그냥 전쟁 나서 다 죽여 버렸으면 좋겠다고. 괜히 되지도 않게 ‘통일’이 어쩌고 ‘해법’이 어쩌고 하지 말란 말이다. 당신들만 입 다물고 있었다면, 벌써 자유왕래하고 휴전선은 그냥 선(線)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니 입 좀 닥치고 이 책이나 좀 읽어보라. 늦봄 문익환의 삶과 당신들의 구린내 나는 비굴을 조용히 비교하면서 평생에 단 한 번 ‘착한 일’ 좀 해보란 말이다. (다음블로그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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