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과 전망] ‘비준과 대선, 여의도 바깥 동력이 관건’
▲ 2일 오후 4시, 우리 측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오른쪽)과 카란 바티아(Bhatia) 미 무역대표부 부대표가 최후협상이 열렸던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협상 타결을 공식 발표한 뒤 악수하고 있다.
한미FTA 협상이 타결된 다음날인 2일 아침 조간신문의 1면 머리기사는 대단했다. 특히 조중동 신문의 호들갑스런 제목 뽑기와 편집은 기억에 남을 만하다. ‘제3의 개국, 집념의 리더싶, 뚝심’ 등의 표현이 동원됐다.
3일 저녁 텔레비전과 다음 날 조간신문이 전달해주는 국민 여론 조사 결과는 찬성 여론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보도됐다. 한겨레 등 일부 신문에서 합의문의 '숨은 폭탄조항'과 정부 보완대책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섰지만 국내 여론에 어떤 영향을 줄지 아직 불투명하다. 한미FTA의 두번째 전선, 국내 전투도 이렇게 쉽지 않게 시작되고 있다.
두번 째 전선, ‘국내 전투’와 3개의 대치선
한미FTA는 대내협상이자 대외협상이다. 민주정부라면 대내협상의 결과를 갖고 대외협상을 벌이는 게 순리다. 그러나 현 정부는 대내협상 없이 대외협상을 타결해 버렸다. 순서가 뒤집힌 것이다. 이제 협상은 끝났고, 대외협상의 결과를 갖고 대내협상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 됐다.
물론 이 때늦은 대내협상에 대한 정부와 반대 진영의 이해는 크게 다르다. 정부는 협상 체결을 기정사실화한 상태에서 그저 통과의례 정도로 보고 있다. 반면 반대 진영은 협정의 체결 여부를 원점에서 판단하는 주권적 권리의 뒤늦은 행사로 파악하고 있다. 한미FTA를 둘러싼 내용적 대치선은 크게 세 가지다. 먼저 기 타결된 협상을 무효로 할 수 있느냐에 대한 입장차가 있다. 타결 이후 대내협상의 성격에 대한 상반된 이해다.
다른 하나는 협상 결과에 대한 상반된 평가다. 정부는 성공한 협상이라고 하고, 반대 진영은 ‘조공협상’이라고 혹평한다. 끝으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극단적으로 다른 평가가 있다. ‘집념의 리더십’(중앙일보)이라는 낮 뜨거운 상찬이 따르는가 하면 “민주적 기본질서를 공격하고 파괴한 독재자”라는 비난이 있다.
적은 우군이 되고
이 세 가지 대치선을 사이에 두고 한미FTA 찬성파와 반대파는 첨예하게 맞서 있다. 이 싸움에서 노 대통령의 가장 든든한 우군은 한나라당과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수구언론이다. 한미FTA협상을 계기로 실질적인 대연정이 이뤄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중앙일보의 전면적인 지원은 특히 눈에 띈다. 이 신문은 3일자에서 한미FTA 관련 기사를 13면에 걸쳐 깔았다. 이들 기사의 논조는 1면 탑기사의 헤드라인에서 충분히 유추된다. '제3의 개국..... ‘대한민국 G7’ 시대 연다'
한나라당의 지원도 만만치 않다. 강재섭 대표는 3일 “선진경제의 큰 바다에 우리가 뛰어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압권은 전여옥 최고위원이었다. 현 정부를 험구하는 기술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그녀는 “김종훈 우리측 수석대표와 이혜민 기획단장, 총사령탑인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을 역사가 기억할 것”이라며 정반대의 재주 역시 만만치 않음을 증명했다. 이밖에 열린우리당, 통합신당모임도 찬성 기류가 강하다. 대권 주자 가운데선 이명박 전 시장, 박근혜 전 대표, 손학규 전 지사, 유시민 장관, 한명숙, 김혁규 의원 등이 찬성 입장을 보이고 있다.
우군은 적이 되는
노 대통령의 맞은편엔 민주노동당 의원들을 위시한 51명의 '비상시국회의' 소속 의원들이 있다. 이들 가운데는 김근태, 천정배, 권영길, 노회찬, 심상정 의원 등 대권 주자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각 당의 농어촌 지역구 의원들도 잠재적 반대파로 분류된다. 민주노동당 관계자는 국회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현재 한미FTA에 대해 명시적인 반대 입장을 갖고 있는 의원이 67~68명에 이른다고 전했다.
여의도 바깥엔 진보적 시민사회단체가 있다. 지난 2004년 노 대통령의 탄핵을 막기 위해 거리에 나섰던 이들은 그로부터 정확히 3년 후 노 대통령을 탄핵하기 위해 거리로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다. 중립지대에서 분명한 입장 표명을 않고 있는 부류도 있다. 국회의원 상당수가 그렇고, 대권주자 가운데선 정동영 전 장관, 정운찬 전 총장 등이 비판적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톤이 강하진 않다.
정치공학적으로 볼 때 국회 비준 여부는 이들 중립지대에 있는 인사들을 어느 진영이 끌어당기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는 어느 진영이 여론을 움직이느냐에 따라 좌우될 공산이 크다.
▲ 종이봉투로 가면을 만들어 쓰고 한미FTA저지 캠페인을 하는 시민들.
협정 체결 국면 : 타결 이후-6월 협정 체결
올해 협상 찬반 양측의 여론전은 대략 세 개의 국면을 거칠 것으로 보인다. 1단계는 협상 타결 이후부터 협정을 정식으로 체결하는 6월말까지다. 이 국면에서 정부를 비롯한 협정 찬성파는 협상의 의미와 성과를 홍보하는 한편 피해 계층에 대한 대책을 내놓으면서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협정 반대파의 경우 협상 내용 공개, 체결 반대가 활동의 방향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국회에서는 ‘비상시국회의’가 각 상임위별 청문회를 준비하고 있다. 농해수위, 보건복지위, 문광위, 재경위, 통외통위 등 5개 상임위가 주 타깃이다. 이를 통해 협상의 세부적인 문제점을 낱낱이 드러내는 데 집중할 예정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게 슬로건이다.
이들은 또 제주 감귤 및 한우 브랜드 지역 등 한미FTA로 인해 극심한 피해가 예상되는 지역을 순회하며 반FTA 전선을 조직한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한편 이들 가운데 국회 FTA특위 소속 의원들은 조만간 특위 무용론을 제기하며 순차적으로 특위 탈퇴를 선언할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 바깥에선 범국본이 촛불집회와 대규모 시위 등을 지속하며 반대 여론을 모아나갈 계획이다. 당장 범국본은 오는 7일 서울 시청 앞에서 대규모 집회를 계획하고 있다. 이들의 슬로건 가운데는 ‘노무현 정권 퇴진’도 있다.
비준 국면 : 협정 체결 이후-9월 정기국회
노 대통령의 의지로 볼 때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협정은 6월말 정식 체결될 가능성이 크다. 여론전의 제2국면은 협정 체결 이후인 7월부터 9월 정기국회까지다. 이 국면의 이슈는 국회 비준이다. 현 정부 임기 중 협정을 비준하려면 이 때 해야 한다. 반면 협정 반대파로선 사활을 걸고 막아야 한다.
변수는 두 가지다. 먼저 한나라당의 태도다. 농어촌에서 지지율이 높은 한나라당이 대선을 앞두고 한미FTA라는 뜨거운 감자를 손대는 건 버겁다. 한나라당 입장에선 굳이 현 정부 임기 중에 협정을 비준해야 할 이유도 없다. 혹 협정 비준에 실패하면 현 정부의 리더십 탓으로 돌리면 된다.
이를 위한 ‘알리바이’도 마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회 FTA 특위 한나라당 측 간사인 윤건영 의원은 2일 KBS 토론에서 “개헌 추진, 남북 정상회담 추진을 접지 않는다면 한미FTA는 18대 국회가 돼야 비준이 가능하다”고 했다. ‘대통령의 정치’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 국회 비준에 응해줄 수 없다고 엄포를 놓은 것이다. 동아일보도 3일자 사설에서 노 대통령에게 비슷한 취지의 충고를 했다. 한미FTA가 뜨거운 감자이긴 범여권도 마찬가지다. 소위 전통적 지지층인 개혁적 유권자의 상당수가 협정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대선을 앞두고 ‘통합을 이루어야 하는 시기에 한미FTA가 외려 ’분열‘을 촉진할 수 있다는 점도 부담스럽다.
맞은편에선 비준에 반대하는 정치권 안팎의 투쟁이 최고조에 이를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정치권에선 국정조사를 통해 협정의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추궁하려는 시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것들이 9월 정기국회에서 여의도 정치권이 협정 비준 문제를 적당히 뭉개고 넘어갈 것으로 내다보게 하는 이유가 된다.
이와 관련,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은 2일 “협상이 체결되고 국회로 비준동의안이 넘어오는 것은 9월 중순이다. 그런데 협상 내용이 방대하고 또 그동안에 국회에서 전혀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비준동의안 심의 과정을 거치더라도 물리적으로 12월까지 이것을 처리하기 어려운 것 아니냐"면서 "일단 대선을 넘기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대선 국면 : 정기국회 이후-대선
여론전의 제3국면은 정기국회 이후부터 대선까지다. 곧 대선국면이다. 이 때 각 정파와 대권주자들은 한미FTA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밝힐 것을 요구받을 가능성이 크다. 일각에선 한미FTA에 대한 태도를 놓고 정치권이 크게 두 패로 갈릴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대선 이후 18대 국회에서의 비준 문제를 고려하면, 반대파의 입장에선 ‘친FTA 후보 대 반FTA 후보’의 양자 구도로 대선을 치르는 게 바람직하다. 이렇게 되려면 한미FTA에 대한 태도가 세력 재편의 가장 유력한 기준이 돼야 한다.
정치공학적으로만 보면 현재 협정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는 김근태 전 의장이나 천정배 의원 등 범여권의 개혁 분파가 반FTA 진영과 정치적인 운명을 함께 하는 정도가 돼야 한다. 그러나 사태가 그런 식으로 전개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김 전 의장이 얼마 전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한 발언은 자신의 미래의 선택지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소위 ‘평화개혁세력’ 내에서도 한미FTA에 대한 인식차가 크다는 지적에 대해 “정치는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라며 “토론을 주고받는 과정에 국민들이 ‘차이가 있지만 이 범위에서 같이 할 수 있지 않나’ 판단해 줄 수 있고, 서로 다르지만 수구적인 한나라당 후보들과 경쟁하기 위해 대연합을 이뤄야 한다고 결단할 수 있다”고 했다. 김 전 의장을 포함한 구여권의 정치 세력들에게 한미FTA는 ‘통합’의 변수가 되는 여러 정책들 가운데 하나의 지위에 머물 공산이 크다. 따라서 한미FTA에 대한 입장차는 그대로 둔 채 ‘반한나라당’ 전선에서 손을 잡는 방향으로 통합이 이뤄질 개연성이 있다.
▲ 한미FTA 저지 민주노동당원 대회에 참석한 당원들.
“여의도 바깥이 열쇠를 쥐고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선거연합 후 통합’을 구여권 통합의 방안으로 훈수한 것은 정치공학적 묘책으로 보인다. ‘통합’을 이루면서도 정체성의 갈등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미FTA가 이슈의 복판에서 밀려나고 ‘한나라당 대 반한나라당’이라는 묵은 구도가 재연되면 18대 국회에서 협정 비준을 막을 수 있는 정치적 동력을 확보하기 어렵게 된다.
때문에 진보 진영은 한미FTA를 대선의 핵심 이슈로 부각시키는 데 사활을 걸 것으로 예상된다. 또 역으로 이런 노력이 성공할 경우 ‘통합’과 ‘반FTA’ 사이에서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정치세력의 거취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여의도 내부의 움직임을 점치기 위해 여의도 바깥의 움직임을 주목해야 하는 때가 있다. 한미FTA 협정을 둘러싼 대치선이 대선 구도와 맞물려 있는 올해의 경우 특히 그렇다.
민주노동당의 한 당직자는 얼마 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태 전개의 키는 여의도 바깥이 쥐고 있다. 민주노동당과 비상시국회의는 여의도 바깥의 투쟁을 지원하고 응원하는 바람잡이요, 불쏘시개다” (레디앙/정제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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