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반성해야 할지, 지금도 헷갈리고 있는가?
대선후보 선출방식을 둘러싸고 당 대선기획단을 중심으로 논란이 계속 되다 최고위원회를 통과해 중앙위원회에서 논란 끝에 과반수를 대의원 대회 안건으로 상정되었다. 이것은 지난 공직후보 선출 때에도 전국적으로, 때로는 지역적으로 제기되어왔다. 지난 대선에서도 민중경선으로 후보를 선출하자는 주장이 있었고, 어떤 지역에서는 총선후보를 당원직선이 아닌 방식으로 선출한 적이 있었다. 따라서 어찌 보면 이는 오래된 논쟁이기도 하다. 그리고 오래된 논쟁의 결과로 당이 채택하고 있는 결정된 사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논쟁은 계속 된다.
여기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렇게 오래도록 논쟁하고, 또 결정된 방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이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선거가 닥쳐왔다는 점이다. 손익계산에 분주해진 나머지 계산기를 열심히 두들기기 시작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다. 물론 그 손익계산이 누구의 손익을 염두에 둔 것인지는, 논란을 이어가는 사람들 모두 당이라고 일치된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논란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당원직선으로 후보를 선출하자는 것과 확대된 선거인단(세액공제와 의원실 후원자들을 포함하는 후원당원의 참여, 별도의 선거인단을 구성하는 방식 등)의 투표로 선출하자는 것이다. 이른바 ‘오픈프라이머리’가 논란의 핵심이다. 이 주장은 과연 당에 이익이 되는 것일까, 아니면 의미 없는 것일까?
미국에만 있는, 그것도 절반이 안 되는 주(州)에만
‘경선개방제’는 미국에만 있는 제도고, 그것도 절반이 안 되는 주에서만 시행되고 있다. 72년 민주당이 대선후보 선출규칙을 바꾸면서 일부 주에서 당원가입과 권리행사 규정을 완화하고, 뒤이어 일부 주에서 당원이 아닌 자도 당내 후보선출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선거법을 바꾸면서 ‘오픈프라이머리’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미국이 이 제도를 도입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 대통령은 국민들이 직접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선거인단을 선출하고 그 선거인단이 대통령후보를 선출하는 간접선거이기 때문에 선거과정에 국민들이 후보에게 직접 투표할 수 있도록 보완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즉 투표과정에 국민들이 직접 후보에게 투표할 수 없는 한계 속에서 탄생한 제도인 만큼, 제도를 달리하는 우리나라와는 그 상황이 같지 않다.
그럼에도 ‘경선개방제(오픈프라이머리)’가 논란이 되는 것은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의 언더독-효과(underdog effect)에 대한 동경이 배경에 깔려 있다. 정치기획으로서만 갖는 일면적인 효과를 차치하고, 국민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는 후보를 선출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주장과 ‘오픈프라이머리’ 시행과정에서 다수의 선거인단을 지지자와 선거운동원으로 결집하여 일찌감치 조직적인 선거운동이 가능하다는 청사진이 논란의 배경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과연 그러한가?
민심의 반영은 선출방식에 있지 않다
삼보일배와 보랏빛 머플러는 이미지정치의 한계를 이미 충분히 보여주었다. 이미지정치의 핵심은 머리와 언행의 일치에 있다. 내용과 실천이 일치하지 않고서는 왜곡된 이미지만을 유권자에게 전달할 뿐이고, 비어 있는 실체에 대한 대중의 판단은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다. 말하지 않고 가만있다고 해서 한 수 가르치려 든다면 큰 코 다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거슬러 올라가서 노무현 후보의 대선승리는 언더독 효과가 없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요인이 있다. 그것은 지역주의와 보스정치, 구태의연한 가르침 정치, 일반인과는 다른 경기고 서울대 출신의 엘리트정치로 상징되는 이회창 후보에 맞서 ‘바보 노무현’으로 대표되는 내용이 시대의 흐름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그 흐름이 민심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든, 노무현이 창조한 이데올로기가 대중을 사로잡았든,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노무현의 정치기획이 민심을 움직였다는 것이고, 그 핵심은 후보선출과정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규모 있는 선거인단을 사전에 지지자와 선거운동원으로 조직하여 일찌감치 조직적인 선거운동이 가능하다는 청사진은 지금까지의 실험에서 확인되지 않은 지나친 낙관이다. 정치는 장래의 꿈에 대한 제도적 실천이기에 꿈을 기획하지 않는 정치는 감동적이지 않을뿐더러 별 의미도 없다. 그러나 실현가능하지 않거나, 과장된 꿈 역시 감동적이지 않고 의미 없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당이 처한 현재의 환경을 고려할 때 일부에서 이야기하는 50만 선거인단 조직은 현실적이지 않다. 특히 정파의 대립구도에서 자유로운 50만 선거인단이 되기 위해서는 당원들이 모집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발적인 참여가 전제가 되어야 하는데, 그럴 경우 그 실현가능성은 더욱 의심스러워진다. 자파 선거인단을 모집하기 위해 대중조직에게까지 당의 정파갈등이 전이될 수 있고, 당원들의 주변인들에게도 정파갈등이 증폭되어 전달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늘어난 숫자가 정파갈등의 대립을 확장시킬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 중에서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당의 선거운동원으로 활동할 수 있을까. 차라리 현재 195개에 이르는 전국 각지의 지역위원회 활동을 쇄신하고, 4만 5천명에 달하는 당권자들의 활동력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것 아닌가 곰곰이 짚어봐야 하지 않을까?
당원과 좌익적 사고-민심을 움직일 수 있다는 자신감 회복의 원천
당의 활동은 민심과 일치해야 한다. 현재 시점에서 민심과 다소 동떨어져 있다하더라도 당의 적절한 활동으로 민심을 돌리거나 새로운 민심을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도 물론 그러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핵심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문제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우리의 비전을 대중의 이해관계 속에서 시의적절하게 제시하고, 이것을 실천할 수 있는 당의 역동적인 실천 활동으로 대중들의 믿음을 획득하는 것이다. 즉 내용과 정치활동의 실천에 있다는 점이다. 지금 현재 우리 당이 겪고 있는 어려움의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힘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두 말 할 나위도 없이 그 힘은 당원과 민중의 이익에 부합하는 좌익적 사고에 있다. 거칠게 표한하고 있는 좌익적 사고에 대한 부연은 생략하고, 당원들의 힘은 간과할 수 없다. 특히 최근 당의 내외적인 형편으로 인해 당에 대한 당원들의 불만과 불안은 적지 않다. 당원으로서의 자신감과 명예로움은 찾아보기 힘들다. 당 활동가들조차 막막함에 부딪혀 있는 것이 사실 아닌가.
당원들과 당 조직을 다시 주체로 세워야 한다. 정치학적으로 ‘정당의 정치결사의 원칙을 부정하는 오픈프라이머리’도 재고의 대상이지만, ‘민심을 움직일 수 있다는 자신감의 원천’인 당원들을 역소외해서는 안 된다. 정당정치의 기본이 정치학 교과서가 아니라, 민주노동당 운영과정에 실재하고 있음을 잊지 말자. ‘오픈프라이머리’는 이미 지나간 시대의 경향이요, 실체 없는 허구적인 개혁세력의 퇴행적인 전유물임을 명심하자. 당의 위기 속에서 대선후보 선출방식이 논란이 거듭되는 지금, 과연 우리는 민심을 어떻게 쫓아야 할 것인가? (장태수/서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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