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조치 판결을 내렸던 이들 중 20여명이 법원 고위직, 그중 ‘몇몇 분’은 법관 중의 법관인 대법원 판사로 근무 중이란다. 사건을 수사한 검사까지 포함하면 더 많을 것이다. <한겨레신문> 보도에 따르면 “지금도 그때 일을 떠올리면 괴롭다. 돌이키고 싶지 않다” “살아있는 법이라서 하는 수 없이 집행했다.” “서울에 있고 싶지 않았다.” “사표를 던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라고 나름대로 괴로운 심경을 피력했다고 한다. 물론 대답하고 싶지 않다거나, 법대로 한 일이라는 한술 더 떠 떳떳한(이쪽 시각으로 보자면 후안무치한) 반응을 보인 무리들도 있었단다.
길게, 구구절절, 쓰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앞으로 <영초언니>연재에서 그 당시 시대상과 형사, 검찰, 법관들의 문제는 소상하게 다루게 될 터이므로. 그러나, 한가지만은 미리 말하고 싶은 게 있다. 내 주변에도 그 시절 일을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는 선배가 있다. 당신들과 전혀 다른 이유에서다. 아니, 같은 이유이기는 하다. 고통스러워서 잊고 싶다는 게 그 선배의 말일까?
영초 언니의 친구인 그 선배는 1979년 4월, 그 날 이전까지는 서울 시내 사립여중의 교사였다. 대학 시절 이미 문학상을 여러 번 타기도 했던 그녀는 위대한 작가를 꿈꾸며 잠시 지구의 한 모퉁이에서 숨을 고르고 있던 차였다. 그러나 4월 그날 이후 그녀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연행되었다가 풀려나긴 했지만, 오랜 불법연금과 언어폭력을 겪으면서 작가로서는 큰 자질이었을 예민함과 섬세함 때문에 그녀는 다른 여느 연행자들보다 더 큰 고통을 겪었다. 학교에서도 불기소처분 된(그 어떤 시위에도 가담한 바가 없음이 드러났는데도 무혐의 처분은 나지 않았다. 왜? 지나치게 적극적인 판결이므로) 것을 문제 삼아 그녀를 내쫒았다. 오갈 데 없는 그녀의 방황이 시작된 것이다.
지금 그녀는 서울의 한 위성도시 변두리의 10평도 안 되는 임대아파트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다.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다. 목련 같던 그녀의 변모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한 남자 후배는 그녀를 만나고 오던 날, 내 앞에서 술을 마시다가 목을 놓아 울었다. 짐승처럼 꺼이꺼이 울던 그의 들먹이는 어깨를 나는 오래 바라다보았다.
그 때의 판사들은 지금도 ‘지엄한 법을 논하는’ 자리에 앉아 이렇게 말한다. ‘살아 있는 법이어서 하는 수 없었노라고(그럼 죽은 법을 갖고 판결하나?)’ ‘그만 두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고’(그만 두기 싫어서 발버둥 쳤지만 쫒겨 난 교사도 있었다). 젠장, 판사님들은 왜 그렇게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지 못하시는 건지 모르겠다. 자기 삶도 스스로 못 추스르면서 어떻게 남의 인생을 추상같이 재단하시는지.
결국은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인가? 대법원 판사가 된 높으신 분들과 작가의 꿈을 체포당한 채 교사신분까지 박탈당한 그 선배. 이제 와서 죄를 묻자 거나 불이익을 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일이 있었음을 공개하고 시인하는 고통마저도 감당하지 않겠다면, 정말 인생이 너무도 불공평한 게 아닌가 말이다. (은퇴기자 블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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