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사회가 요즘 ‘하르츠 IV’ (일명 ALG II)로 불리는 노동 및 사회복지 제도를 둘러싸고 뜨거운 논란을 벌이고 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가 이끌던 사민당과 녹색당 연정이 2005년에 도입한 하르츠 IV는 종전의 영세민 보조금과 실업수당을 통합해 저소득층 및 실업자에 대한 복지급여 혜택을 강화한 정책이다. 현재 수혜자가 670만명 이상으로 독일 노동ㆍ복지 정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대책이라곤 전무한 우리 현실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 독일 자동차회사 다임러 크라이슬러 노동자들이 정부의 복지제도 개혁과 관련해 하르츠 IV 제도를 거론하며 시위하고 있다. (사진:시사 IN)
도입 초기부터 끊임없이 찬반 논란을 일으켰던 하르츠 IV의 수혜자는 △직업을 물색 중인 장기실업자 △월 400유로(약 62만원) 이하 소득자 △직업훈련생 △부양 자녀를 가진 별거자 △16세 이하 어린이 등이다. 그동안 하르츠 IV 수혜자가 매년 늘어나 지난 1월 현재 국민의 9.1%에 해당하는 총 673만 2000명으로 증가했고, 연간 약 480억 유로(약 75조원)가 지원되고 있다. 이 중 158억 유로는 주택비와 난방비 보조금이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처럼 막대한 지출을 하는데도 국민의 61%는 하르츠 IV 수혜자에 대한 지급액이 너무 적다고 생각한다. 반면 나머지 40%는 “수혜자들의 일부는 게을러빠졌고 소파에서 텔레비전이나 시청하면서 하루 종일 빈둥거린다.”고 비난한다. 게다가 지난해에는 16만여 명이 일자리를 갖고도 허위 자료를 제출해 지원금을 수령해온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해 롤란트 코흐 헤센 주지사 같은 정치인들은 “하르츠 IV 수혜자들을 철저히 가려서 강제 취업시켜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하르츠 IV를 둘러싼 논쟁이 격해지는 가운데 연방헌법재판소(헌재)는 지난 2월9일 독일의 노동ㆍ복지 정책에 일대 전환을 예고하는 판결을 내렸다. “실업자와 저소득층에 대한 현행 하르츠 IV 지원액이 너무 적어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존엄성 있는 삶을 보장하지 못한다. 관련 법규를 올해 안으로 개정하라..” 헌재는 특히 자녀들에 대한 지원 규모를 증액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복지병을 들먹이는 우리 사회 기득권층들과는 정 반대다.
“이 같은 헌재 판결에 가장 곤혹스러워한 곳은 연방 재무부였다. 만약 헌재 판결에 부응해 자녀 지원금을 올리고, 야당과 노조가 주장하는 독신자 기본지급액을 현행 359유로에서 440유로 선으로 인상할 경우 200억 유로 정도 추가 지출이 예상되기 때문이었다.” (노동시장 조사 전문가 미카엘 파일 박사 주장).
그러나 유권자들을 의식한 정치권에서는 사민당ㆍ좌파당ㆍ녹색당을 비롯해 우파 연정의 한 축인 기독교사회당까지 노조와 한목소리로 무조건 하르츠 IV 증액을 요구한다. 이 같은 증액 찬성론에 반해 자민당 및 기독민주당 일부와 재계ㆍ학계에서는 “증액은 비현실적이다”라며 제동을 걸고 있다. 또한 뮌헨 IFO 경제연구소의 한스 베르너 소장이나 기사당의 호르스트 제호퍼 당수는 “생활비가 높은 지역과 낮은 지역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원액을 배정해야 한다”라며 한발 더 나서고 있다.
이런 와중인 지난 2월12일, 기도 베스터벨레 부총리(자민당 당수)는 헌재의 하르츠 IV 위헌 판결에 대해 색깔 시비를 제기하기에 이른다. 복지급여 증액을 정면으로 반대한 것이다. “독일이 사회주의 열차에 올라탄 격이다. 이 나라가 사회주의 국가냐? 노력하지 않는 국민에게 복지를 약속하는 것은 로마 말기의 퇴폐를 불러들이는 조처다.”
이런 발언이 보도되자 사민당ㆍ좌파당ㆍ녹색당 등 야당과 노조는 연일 베스터벨레 부총리를 공격하고 있다. 가브리엘 사민당 당수는 “베스터벨레는 노동ㆍ복지ㆍ사회 정책의 방화자다”라고 힐난했다. 프랑크 비르스케 공무원노조 위원장은 “최저 생계비로 연명하는 수백만명의 빈곤층을 무시하는 망언”이라고 베스터벨레를 비난했다. 클라우스 에른스트 좌파당 당수, 젬 에르데미르 녹색당 당수도 비판에 가세했다.
▲ 2월9일 한스위르겐 파피어 독일 헌법재판소 소장(왼쪽)이 하르츠 IV 예산을 증액하라고 판결하고 있다. (사진:시사 IN)
‘복지급여 증액 반대’ 주장은 정치 쇼?
베스터벨레에 대한 비판은 좌파 진영에서만 제기된 것이 아니다. 우파 연정의 한 축인 기독교사회당의 호르스트 제호퍼 당수, 자민당 부당수인 안드레아스 핑크바트도 베스터벨레를 비판한다. 그러나 베스터벨레에게 가장 큰 타격은 가장 긴밀한 정치 파트너였던 앙겔라 메르켈 총리까지 그를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메르켈 총리에게는 “베스터벨레 발언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취하라”는 요구가 집중되는 형국이다.
그러나 적어도 최근까지 베스터벨레 부총리는 소신을 꺾지 않고 있다. “일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소득이 발생해야 한다. 독일은 복지 관련 지출이 전체 예산의 60%를 차지하는 나라라는 사실을 국민에게 알리고 싶다. 국회에서 토론으로 진실을 가려보자.” 이참에 독일이 사회주의 국가인지 아닌지를 가리겠다는 기세다.
베스터벨레의 도전적 언행을 두고 최근 자민당 지지율이 지난해 9월 총선 때 14.6%에서 8%로 급락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지지율을 만회하기 위한 인기 영합적 제스처라는 것이다. 하르츠 IV 논란은 최근 ‘최저임금 인상론’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미용사 등 저임금 근로자들의 시간당 임금(5유로 정도)이 하르츠 IV 수혜자들의 복지급여보다 적다는 사실이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노조와 야당은 “최저임금을 시간당 최소 7.50유로 이상으로 법제화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하르츠 IV 논란은 중도좌파인 사민당과 녹색당, 그리고 극좌파인 좌파당 진영의 연대를 가져와 종국에 좌파 대연정 출범의 진로를 터주고 정치 지형에 큰 변화를 가져올 가능성을 열어준다. 5월에 실시될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지방선거 결과에 벌써부터 정치권의 관심이 쏠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 지금 이 주에서 연정을 구성한 기민당과 자민당의 지지율은 최근 급속히 내리막을 걷고 있다. 복지는 시혜가 아니라 국민이 누릴 당연한 권리로 ‘국가가 책임지라’는 헌법재판소가 있다니 부러울 따름이다. (시사 IN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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