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생태

앞산 달비골에서는 듣는 쌍용자동차 살인 진압 소식

녹색세상 2009. 8. 4. 00:44

 

대구의 어머니산인 앞산 중에도 가장 생태 보존이 잘 되어 있는 달비골에 본격적으로 몸을 담은 지 9개월이 넘었다. 빚 갈이 하려고 얼떨결에 ‘내가 하겠다’고 말을 뱉었다가 아직도 발을 빼지 못하고 있다. 이런 나를 보고 ‘고민은 하지만 결정을 단순하게 하는 선배의 본성이 드러난 것’이라는 동지들의 걱정이 고맙기 그지없다. 함께 한 동지들의 벌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게 최소한의 예의라고 배웠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욕하는 조폭들 보다 더 못하다. 그들은 최소한 싸움에 뛰어든 조직원들의 변호사 비용은 물론이요 감옥살이 치닥꺼리와 생계비를 해결해 준다. 

 

돈이 없는 우리가 그 정도는 못하더라도 옥바라지와 벌금 문제는 같이 머리를 맞대는 게 고생한 동지에 대한 기본 도리요 의리다. ‘농성장이 풍족하면 안 된다’는 누구의 소리는 1980년대 전세금 빼가며 운동하던 시절의 무용담을 지금에 적용하려는 억지에 불과하다. 정말 치열한 시대를 보낸 사람이라면 ‘얼마나 무식한 방법’이었다는 걸 더 잘 안다. 더구나 싸움과 업무를 동시에 해야 하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더 현실성 없는 소리란 걸 알 것이다. 공안 기관은 날고뛰는데 우리들의 투쟁 방식은 지난 날을 고집한다면 이미 알고 있는 그들이 보기에 우스운 것은 두 말 하면 잔소리다.

  

 

오늘 낯선 전화가 왔는데 서울 사는 중학교 동기였다. 평소 다른 동기들이 ‘저 놈 별 나다’고 할 때 ‘그래도 윤희용이가 하는 게 틀린 게 없다’며 편들어 주던 친구라 오래도록 통화했다. 한 겨울 나무 위 농성을 할 때 ‘부모님은 그렇더라도 자식은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하던 그 동기 남편이 군 고급장교란 걸 처음 알았다. 모두 묵묵부답일 때 ‘자식 걱정 안하느냐’기에 그저 생각이 반듯한 친구인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철학의 기본 명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게 사람인지라 더 놀랐다. 사람 사는 세상에 예외는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종일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 소식에 눈을 뗄 수 없었다. 경찰병력 투입 소식을 들으면서 매 순간 가슴이 조여 왔다. 차라리 내 몸이 저 곳에 가 있다면 미안한 마음이라도 덜 하련만 그러지 못해 더욱 빚만 쌓여간다. 사람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전쟁터를 보면서 가지 못하는 처지가 더 원망스럽기만 하다. 평소 몸을 단련해 왔건만 결정적인 순간에 함께 하지 못하니 입이 열 개라도 할 할 말이 없다. 운동선수가 훈련하는 것은 시합에 나가기 위한 것이고, 군인이 훈련하는 이유는 전쟁에 대비하는 것인데 갑갑한 가슴만 졸이는 나 자신이 너무 속상하고 밉기만 하다.

 

 


아무리 얻어터져도 치료해 줄 후배가 그 동네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겠다’고 하지 못하는 내가 너무 밉기만 하다. 앞산터널 저지 나무 위 농성도 가까운 곳에 내 몸을 잘 아는 주치의사인 후배가 있어 건강 문제를 걱정하지 않고 했듯이, 평택가면 어지간한 부상은 그냥 치료해 줄 후배가 있는데 달비골에서 머리만 싸매고 앉아 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물이 끊기고 소화전도 끊기고 전기마저 차단된 암흑 천지에 사는 우리 형제들이 있음을 알면서도 속만 태우는 처지가 너무 얄밉고 속상하다.

 

제발 하나 뿐인 사람의 목숨이 무참하게 죽어나가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 뿐이다. ‘서울 용산보다 더 위험하다’고 경찰이나 소방책임자들이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밀어 붙이니 더 가슴이 졸인다. 이건 ‘죽어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미 죽은 자들에게 ‘확인 사살’하는 것이지 사람을 살리려 것이 아니다. 이런 현실을 장성한 조카들과 자식들에게 보여줘야 하는 못난 조상의 처지가 원망스럽기만 하다. 임신 8개월의 산모가 절규하는 소리가 심장을 갈기갈기 찢는 것 같아 오늘도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것 같다. 제발 더 이상 사람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